‌< 도시, 상상하고 기록하기 >에 대한 토론문 #1

'보이지 않는 도시' 탐구하기



이화진 / 아티스트, 이룹빠! 대표



세잔의 작품을 '다시점'이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인식론적 불가능성을 존재론적 파국으로 이해한 입체파의 오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세잔이 이야기한 것은 '세계는 우리 인식의 한계 너머에 신비롭게 존재한다' 에 가까웠지만 입체주의는 이것을 '알 수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고전적 세계관의 종말을 곧바로 정육점식 해체로 몰고 갔다. 마르셀 뒤샹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오해는 교정되지만(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여기서 요지는 다시점, 혹은 다층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다시간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차라리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잔의 작품을 묘사하는 말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관객이 그림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안에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관객의 적극적인 (시간적인)참여를 잘 표현하는 말로 이러한 독해와 함께 회화는 비로소 현대적인 '미디어'가 된다. 즉, 그 자체 독립적인 자리를 주장하는 물건이 아니라 매개물의 위치를 획득한다는 이야기다.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도 이러한 세잔적 전회를 필요로 한다. 즉 카테시안 작도공간에 갇혀있는 도시공간 이미지를 흔들어 시간적인 경험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참여하는 체험으로 바꾸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아트리츠 콜로미나는 아돌프 로스와 르 꼬르뷔제의 사례를 연구하여 건축이 본질적으로 미디어적 속성을 획득하는 계기들을 탐구한다. 하나는 과격하리만큼 절제된 표현으로(아돌프 로스), 다른 하나는 차고 넘치는 기록과 제스쳐로(르 꼬르뷔제) 각각 건축을 미디어적 존재로 보았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두 계기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건축은 조각이나 회화의 프레임을 제공하는 지위에서 스스로 침묵하거나 수다를 떨 수 있는 모던한 체험 양식으로 성장한다. 고전적인 건축 요소의 해체를 수반하는 이러한 변화에는 파사드와 골조의 분리, 수직동선과 수평동선의 분리, 내부 공간적 위계의 해체와 이벤트적이며 영화적인 공간체험 등이 자리한다. 오늘날 실로 얼마나 많은 파사드가, 얼마나 많은 막다른 골목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건축보다 오히려 도시 그 자체가 이러한 전회를 통해 새로운 미디어로 발견된다. 우리는 이미 발터 벤야민의 파리아케이드에 이런 경험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계획의 출발 시점에 자리하는 카테시안 작도공간은, 마치 사진 장르가 고전시대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공간재현의 출발에 위치하는 것처럼 일정한 리듬의 죽음이자 새로운 공간의 탄생으로써, 그 경계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 한 순간을 고정하는 것과 공간상 (가공의)위치를 고정하는 것은 실은 같은 행위인데 이것은 오늘날 지극히 어른스럽고 직업적이며 전문가적인 역량으로 여겨진다. 그와 함께 절대적인 계획가의 신화가 태어나고, 이상하게도 현대적인 외양을 갖춘 공간의 상상도는 고전주의 회화처럼 알레고리적 독해로 타락하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어린이들과의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이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로 시작한 일이지만 그 계보학적 자취를 더듬다보면 위에 적은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선입견이나 두려움으로 오염되지 않은 생생한 첫만남의 기록들을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어린이들과의 작업으로 연결된다. 교육적인 다른 이유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조차도 우리는 피아제의 발달단계론을 해체하는 카니발페디고지로 생각하고 있다.
 
구부요밴드와 이룹빠의 작업은 이러한 기초 위에 미디어로 포화된 오늘날 인간 체험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상황을 다루고자 한다. 현대 미디어 이론, 미디어 계보학이라고 통칭하는 분야에서는 인간 체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사성동위원소, 플라스틱, 지질시대, 전지구적 네트워크 등을 '하이퍼오브젝트'라 부른다. 도시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인간 수명의 한계를 훨씬 넘어 존속하고, 인간의 통상적인 인식의 한계 너머까지 확장되어 도시 아닌 공간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마치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이 인류 존속에 더 본질적인 것처럼 우리의 도시체험 각각이 사실 도시 자체의 존속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에 이른 상황이다. 자기참조적 무한복제의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행위를 곤충생태와 비교하는 논의로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점액질 도시'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북서울 전시의 전체적인 개요는 '보이지 않는 도시'를 탐구하다보니 만들어진 '점액질 도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우라

제노비아

조라

체칠리아


〈도시, 상상하고 기록하기〉에 대한 토론문 #2

There Is No There



홍주희 / 그래픽 아티스트


* < There Is No There >은 2021년 홍주희 작가가 진행한 실험적 디인 프로젝트이다. “디지털 공간(스트리트 뷰)의 오류와 비물질적 경험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을 그래픽 아티스트의 시선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 <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 ‘뒤티유욀’을 통하여 환영의 세계를 묘사한다. 뒤티유욀은 열린 문으로 드나드는 것처럼 자유롭게 벽을 통과하며 모험을 즐기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능력이 잃어버린 채 벽 속에 갇혀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특별한 능력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벽’이라는 장소이다. 여기서의 ‘벽’은 기존 개념인 ‘하나의 경계’를 넘어 ‘공간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작업의 기초가 되었던 “There is no there; 거기에 존재하지 않으나 어딘가에는 있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공간”이 있다는 것은 문맥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시화된다면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은 다른 존재의 조건이 시작되는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동성을 바탕으로 한 공간과의 관계성은 디지털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제시한다. 이 과정은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입장이 아닌, 양측 사이의 긴장을 필요로 하며 간격을 요구한다. 동시에 그 공간은 ‘뚜렷이 정의된 곳’이라기보다 모호한 성격을 지님으로서 사이의 모순 또는 시차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장소’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은 사이 공간의 결핍된 형태의 시각 요소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것들이 조각되어 야기하는 비물질적 감각의 변용을 작가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공유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인한다. 지금 이곳을 의심하고 낯선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시각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역할이 아닐까?

< There Is No There >은 가상 도시 공간이 개별 객체가 연결된 허구의 세계이며, 사이버 공간에는 공간이 없음을 ‘오류’를 통해 드러내는 디자인 프로젝트이다. 가상 공간은 물리적으로 정확한 위치나 장소가 존재하지 않으며 물리 법칙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 비물리적인 공간이다. 비물리적 공간에서는 사물이 존재하더라도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주체가 실제 공간을 탐험하는 것처럼 작동되는 진정한 공간이 아니라 개별 객체의 집합이며, 개연성 없이 디지털 이미지가 부유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가상 공간이 개별 객체의 집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광화문 광장으로 장소를 선정하고, 구글 스트리트 뷰를 이용하여 관찰하기 시작했다. 스트리트 뷰에서는 길, 동상, 건물이 고정 주체라면 익명의 사람들, 풍경, 날씨는 주체 없는 정보가 된다. 연결되지 않는 거리 풍경, 왜곡된 사람 환영, 편집된 하늘 등 디지털 이미지가 짜깁기된 오류 현상을 기록하였다.

스크린 속 장소는 낯선 것의 방문이면서 동시에 낯선 것으로 향하는 여정일 것이다. 공간 사이에 끼어버린 중간 지대의 비물질적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형이상학적 경험이 시각적 에러 혹은 경험적 글리치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 없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지적 콜라주는 디지털 세계 속 결핍의 세렌디피티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특정 장소와의 개연성 그리고 기억은 탈신체화와 탈공간화 사이를 끊임없이 이동하는 특이점이 되어 지금도 우리를 관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기’와 ‘어디’ 사이의 벽을 넘는 순간, 장소는 시각 언어로서 재형상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지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공간적이다.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파악되는 거리이며 구성 요소는 모든 공간을 기초로 한다. 생각과 생각 사이, 이곳과 저곳 사이, 구성 안에 놓인 어떤 형태의 간격도 우리는 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로 시작되는 차이의 개념은 느낌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또한 공간이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낯섦, 인간과 인간 사이의 낯섦. 나아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새로운 낯설음은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필연적인 사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방인의 눈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낯설게 인식하는 시선을 지닌 이방인. 이번 디자인 프로젝트가 그런 새로운 눈으로 관찰한 공간적 시차의 우연적 효과에 대한 이야기를 위트있게 풀어낸 결과물이 된다면 ‘벽’과 같은 중첩된 영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미지적 오류는 공간적 결핍의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보충적 요소이며 희미함으로부터 출발하여 역동적인 에너지로 나아가나는 ‘생성’으로서의 비물질적 에너지다.

There Is No There

There Is No There

There Is No There

There Is No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