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21년 7월 14일, 오후 7시~9시
- 장소: 노들섬 식물도, ZOOM
- 발제: 임한솔

- 토론: 박세미, 이수학
- 지원: 박영석, 신명진
‌- 기록: 박정은


1부

임한솔   두 분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토론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럼 먼저 이수학 선생님.

이수학   네. 안녕하세요. 이수학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경관과 시의 접점, 경관과 시가 어떻게 만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한솔군이 아주 좋은 이야기를 잘해주었는데요. 저와 조금 다른 입장도 있고, 전반적으로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까 한솔군이 이야기한 것 중에서 도대체 어떻게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 그중에서도 조선시대에 시와 경관이 관계 맺었는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한솔군이 제기했던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다는 아니지만, 공감한다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경관이라고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것은 제가 배운 것으로는 서양에서 한 16세기쯤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또 서양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서양은 유럽이겠죠, 경관과 조경을 같은 단어로 쓰고 있다는 건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경관이라는 단어는 밖에서 들어왔고 그 이전에 아주 다양한 단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것처럼 산수나 풍치, 풍경, 승경 이런 여러 가지 언어들을 가지고 있었죠. 그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지만 재미있는 게 뭐냐면 경관이라는 말이 들어오면서 그 모두를 다 경관 안에 포함시켜 버렸죠. 그게 경관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놀라움인데, 마치 요즘 우리가 디자인이라는 말을 쓰면서 모든 것들을 디자인 안에 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삶을 디자인한다는 말까지 하니까요. 그렇게 경관이라는 단어를 놓고 보면 경관이 늦게 들어오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19세기 말 20세기 초 즈음에 들어왔고, 아니면 훨씬 뒤에 조경학과가 생기면서 들어왔을 수도 있는데 이 단어가 그 모든 것들을 흡수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보통 경관을 지칭하는 단어가 한 4세기부터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역전이 생기는데, 경관이 동아시아에서 특히 4세기까지의 모든 풍경과 풍광, 이런 것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자기화시켜버리죠. 마치 조경이라는 어떤 행위, 학문, 이런 것들이 들어오면서 조경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정원 역사를 다 자기 거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는데요. 어쨌든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경관이라고 이야기하거나 혹은 조경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언제 생겼고 언제 발생했느냐고 국한돼서 인식의 한계를 지을 것이 아니라, 지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확장되어 버리죠. 그 이야기를 우리가 배우기는 하는데 실제로 그것을, 생각을 이어가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 용어에 대한 폭넓은 이해라고 할까, 아니면 수용 이런 것들을 먼저 좀 짚고 넘어가고요.

그 다음에 얘기하고 싶은 게, 게오르그 루카치라고 하는, 『소설의 이론』을 쓴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소설의 이론』이라고 하는 책의 첫 문장에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그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루카치 선생님이 지칭했던 바로 이 멋진 시대는 그리스 시대를 말합니다. 신과 인간이 같이 살아가던, 루카치 선생님의 시각으로 보면 거의 완전한 구조를 가지고 있던 시대죠. 물론 그 이후에 신은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가다 못해 인간은 신을 죽여버리고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소설이 등장하고 소설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다고 하는 게 소설의 이론인데, 이것을 빌려 온 이유는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특히 이제 조선 초기 말고 중기 후반쯤 가면 정조 임금이 있습니다. 정조 임금은 할아버지 때문에 동궁 왕자 시절이 되게 길었습니다. 그래서 그 긴 생활 대부분을 창덕궁 후원에서 보냈을 거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역대 임금들이 창덕궁 후원에 대한 시를 꽤 많이 남기셨는데, 글도 많이 쓰고요, 그런데 정조가 월등합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유일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이제 익종이 또 있는데,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관한 10경의 시를 씁니다. 그게 이제 단순히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아까 이제 한솔군이 무이구곡 이야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경이라고 하는 것, 구곡, 8경, 10경, 12경이라고 하는 것이 시와 공간이 동시에 만나서 이루어집니다. 정조의 10경은, 사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세상에 없죠. 누군가 장소를 찾고 그 장소에서 그 경치가 어떻다고 시를 쓰고, 재미있게도 그렇게 한번 8경이나 10경을 정하고 나면 그 다음 세대 사람들, 아니면 친구가 똑같은 자리에서 그 운을 가지고 약간 다른 시를 계속 씁니다. 이것이 계속 이어지죠. 창덕궁 후원의 정조가 쓴 10경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정조 혼자 10경의 완결된 시를 쓰고 나중에 익종은 의두합 10경이라는 것을 또 씁니다. 그렇지만 10경으로 엮이지는 않지만, 각각의 임금들이 그 자리에서, 여기서 말하는 자리는 주로 정자가 될 텐데 정자가 있는 구역에 대한 시들을 계속 남깁니다.


정조의 10경시를 간단히 보면 관풍춘경(觀豊春景), 망춘문앵(望春聞鶯), 천향춘만(天香春晩), 어수범주(魚水泛舟), 소요유상(逍遙流觴), 희우상련(喜雨賞蓮), 청심제월(淸心霽月), 관덕풍림(觀德風林), 영화시사(映花詩士), 능허모설(凌虛暮雪)이라고 10편의 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창덕궁 후원에 가서 볼 때 창덕궁 후원은 사실은 정조 임금이 살던 시대의 창덕궁 후원하고는 남아있는 것도 있고 변한 것도 있습니다. 근데 사뭇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연경당 같은 경우는 당시에 없었고요. 그런데 이 10편의 시가 단순히 시로 머무는 게 아니라 모두 정자를 지칭합니다. 관풍각, 망춘정, 천양각, 어수정, 소요정 이렇게 다 정자의 이름이고 그 정자의 이름이 곧 시가 됩니다. 여기서 관풍춘경은 관풍각에서 바라본 봄 풍경입니다. 재미있는 건 관풍각은 어디에 있냐 하면 지금의 창경궁의 춘당지, 그 춘당지 앞이 연못이 아니라 사실은 논이었습니다. 권농장이라고 해서 임금님들이 이제 동궐도를 보면 네모난 논들이 한 8~10개인가가 쭉 있습니다. 그 끝에 관풍각이 있고요. 임금이 그 논에서 자라는 벼들을 보면서 그해 농사를 가늠합니다. 물론 잘 자랐겠죠. 왜냐면 궁 안에서 키우는 거니까. 그래도 임금님들이 거기서 시를 씁니다. 관풍각에서 바라보면서. 그리고 어수범주, 어수정이라고 하는 범주는 정자보다는 큽니다. 지금 보면 애련지하고 그 위에 연경당 마당 사이에 연못이 하나 있고요. 그 연못하고 지금 애련지 사이에 어수정이 있었습니다. 범주는 배를 띄우고 노는 겁니다. 단순히 이렇게 작은 배를 띄워 놓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그마한 배를 띄워서 타고 놀기도 했습니다. 뱃놀이를 즐겼고요. 낚시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소요유상은, 옥류천에 소요정이 남아있죠. 거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희우상련은 지금의 부용지 제일 왼편에 보면 희우정이 있습니다. 거기서 느끼는 연꽃 냄새, 비가 오는데 연꽃 냄새를 맡는 그러한 시고요. 그 다음에 청심제월은 바로 그 부용지의 오른쪽에 청심정에서 달밤의 가을 달밤의 풍경을 보는 겁니다. 관덕풍림은 창경궁 앞에 지금의 창경궁에 관덕정이 있고 활 쏘는 것을 구경하는 겁니다. 영화시사는 지금 영화당이 있는데 그 건너편에 춘당지가 있습니다. 그 춘당지에서 예전에 과거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군사 훈련도 했고요. 군사 훈련도 하고 과거도 보고. 근데 이제 영화시사는 영화당에서 임금님이 이제 영화당에 행차하고 그 다음에 유생들이 과거 시험을 보는 것들을 바라보는 풍경입니다. 능허모설은 능허정이라고 창덕궁 후원의 가장 먼 데 위에 있는 정자입니다. 거기서 바라보는 겨울 풍경이라는 뜻이죠.

재미있는 게 뭐냐면, 조선시대 8경이나 10경, 12경 이런 것들에서는 공간과 시가 같이 작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정자라고 하는 어떤 것, 요즘 보면 뷰포인트 같은 거죠, 그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가 같이 움직이고 그 시의 내용이 정자의 이름이고 그렇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10경이라고 하는 게 정조의 10경도 마찬가지지만 우선 공간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이 공간이 하나의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창덕궁 후원의 앞쪽부터 점차 안쪽까지,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능허정이라고 하는 창덕궁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ㄷ자 형태의 작은 공간에 연못이 있거나 그 연못에 따른 정자가 있고 그 연못에 바로 붙어 있는 정자에서 바라고 있는 풍경이 하나 있고 그 정자와 당시를 바라보는 언덕받이에 있는 정자가 또 하나 있고 이렇게 두 개가 하나의 조합을 이루고 이런 것이 몇 개가 됩니다. 그 전체를 또 바라보는 정자가 하나 있고 이렇게 공간적으로 작은 것에서 하나씩 하나씩 모여서 전체로 다 아우르게 되고요. 그 다음에 시점도 다 다르고요. 그리고 사실은 내용도 다릅니다. 농사짓는 거, 시험 치는 거 그 다음에 새소리, 이런 모든 것들을 그 시안에서 담고 있죠. 더 놀라운 건 이 시가 4개의 계절을 다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그 시안에 있고 순차적으로 나오고요. 하나의 시가 하나의 계절을 노래하면서 10개의 시가 네 계절을 노래합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이것이 한 사람에 의해서 끝나면 그 다음 사람이 받아서 이 10개의 시를 다시 씁니다. 그게 경이 순환하는 구조인데요. 이렇게 계속 시간적으로 순환하면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했을 때, 조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당시에는 시와 공간, 시간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 이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움직였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한 시대가 처절하게 깨지죠. 지금은 이제 조선시대가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실은 조선시대의 이러한 관점을 정확히 모릅니다. 마치 외국인 대하듯이 그럴 정도로 우리는 이러한 전통하고는 단절되어 버렸고요.

그리고 제가 쓴 말이 있는데, 이렇습니다. "행위로서의 조경과 감각적 또는 인식적 사실로서 경관 그리고 물리적 실체로서 정원이나 공원 또는 자연. 그리고 행위로서 시작, 시를 쓰는 것과 사물에 대한 시적 감각과 인식으로서 시심, 그리고 물리적 실체로서 문자화된 혹은 문장으로 만들어진 시. 이 둘이 하나의 공간에서 같이 움직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애시당초부터 경관과 시는 하나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조경가와 시인은 하나였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근데 이게 이제 분리됩니다. 어떻게 분리되냐면 조경 자신도 산업화 이후에, 제가 배우는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그분들은 그렇습니다. 산업화 이후에 자연이 사라졌다. 지구에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자연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진짜 그대로 남겨진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면 자연을 재현한다는 조경이 참조할 만한 자연이 사라지는데, 어떻게 재현이 가능하냐는 질문. 이런 질문에 대해서 현재 조경은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시를 잘 모르는 제가 볼 때 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시는 서양이나 유럽이나 상관없이 과거에 시는 시를 쓰는 법칙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시를 썼죠. 그 안에서 시를 썼다는 건 사실은 대단한 구속이기도 하지만. 아주 일체화되어 있다는 것도 되고 그러니까 양면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그런 시의 전통이 무참히 깨집니다. 깨지는 정도를 넘어서서, 신이 계시니까 좀 주제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될 것 같은데 예를 들면 파울 첼란이라고 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시는 읽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전에 번역된 것들은 거의 읽기 힘든 수준이고요. 최근에 이제 작고하신 허수경 시인이 이제 다시 번역해서 나온 첼란의 시들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첼란은 시를 쓰고 마지막에 자살을 했거든요. 몸을 던져 죽은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첼란 같은 경우에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넘어서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 기억으로 인해서 썼는지 그건 제가 판단할 영역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첼란의 시 같은 경우에는 현대시가 갈 수 있는 어떤 극한까지 가면서 독자들이 시를 읽을 수 없을 지경, 끝까지 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시인 스스로가 시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물론 이게 현대시에 여러 시인들이 계시는데, 그 시인들 중 한분이기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이 더이상 시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좀 들고요. 물론 한국은 많이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시 또한 현대 세계와의 어떤 접점을 찾지 못해서 절망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러니까 경관과 시가 둘 다 절망적인 상태에 지금 있다고 봅니다. 그거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면,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게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우리 젊은 친구들이 하고 있는 일은 아닌가 하는 희망을 좀 봅니다.


임한솔    감사합니다 선생님. 크게 보면, 서두로 들어주신 것에는 용어의 문제, '경관'이나 '시'가 해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다음에는 시간, 공간, 경관, 그리고 시 이런 것들이 통합되고 합치되는 것의 역사적인 부분이나 현재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저희 3명이 토론을 이어가는 부분은 쉬는 시간을 갖은 후에 전개하기로 하고요. 다음으로 박세미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토론을 들어보겠습니다.

박세미   저는 시를 쓰는 박세미라고 합니다. 제가 사실은 조경에 대해서 너무 몰라서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 계속 의심이 되는데, 일단 저는 임한솔 선생님께서 발표해 주신 텍스트를 보고,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몇 가지 질문들을, 개인의 차원에서 내용을 조금 가져왔고요. 저는 조금 발제문을 중심으로 가져왔어요. 일단 휘트먼 시인이 나오는데 저는 지금 한국에서 현대시를 쓰고 있는 입장에서 낭만주의 시대의 서정시들, 이제 경관하고 시하고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일치된 시들하고는 약간 거리가 먼 시들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내용들을 보니까. 그런 맥락에서 저는 처음에 나왔던 그 시의 공공성을 보고 되게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시의 공공성이란 무엇일까’라고 생각, 질문을 스스로 해봤고요. 질문하면서, 임한솔 선생님 발제문에 있는 논문을 찾아봤어요. 진은영 시인이 쓰신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공공성’이라는 논문을 보니, 역시 그 두 가지의 의미가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논문에 있는 텍스트를 읽어볼게요.

"플라톤에게 시는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공공의 삶에 기여한 모범적인 인물들. 즉, 우리가 흔히 위인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공적 기능을 수행할 때에만 그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다"라고 했고 또 반면에 아도르노의 관점에서는 제가 현대 시를 쓰는 입장에서, 아도르노의 예술의 무용성을 훨씬 기대어서 시를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지닌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의 무기능성이라고 말한다. 예술 작품은 아무런 기능이 없다는 점 때문에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이 정치적 동기에서 앙가주망의 입장을 취할 경우, 그것은 사회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라는 어떤 예술관을 얘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사실은 시를 쓸 때, 예술을 말할 때 사회가 가지는 질서, 관념 체계에서 가장 동떨어진, 그러니까 예술의 무용성에 기대서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그 시의 공공성을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제가 시를 쓰는 실천의 현장에 있을 때도 사실은 경청과 공감이라는 단어가 아까 굉장히 많이 나왔었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쓸 때 시의 순수성에 다 닿는다고 믿으면서 시를 쓰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예술을 하는 행위 자체가 개인의 고유한 표현 방식을 획득하는 것, 그래서 일반 사회적인 통념에 일반적인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문법을 깨뜨리고 자기의 굉장히 고유한 언어를 획득하는 게 예술이라면 시는 가장 그 비문법을 지니고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좀 아이러니하게도 김행숙 시인의 마주침의 발명이라는 책에 보면 진은영 시인이 보내준 메일을 적어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그 부분에는 이렇게 나와요.

“한때 시 쓰기란, 아니 문학이란 나는 이래, 너도 그렇지라는 공감, 어떤 정서의 전달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시를 통해 습관화된 감각과는 다른 감각을 촉발시키고 나와 내실이 있는 사람들의 신체적 감각을 변화시키는 데 자꾸 관심이 가요. 이 시어를 이리저리하게 배치함으로써 그것이 나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주는가. 우리들은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는 거 아닐까요? 즉 우리는 감각의 비문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떠한 사람들은 의미의 문법으로 우리의 시들을 읽으니 어렵고, 난해해지는 것 아닐까요? 의미의 소통을 추구하는 대신 감각적 촉발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이라는 언어적 전제 자체를 거부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듯 합니다"

저 역시도 시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어떤 소통이라든지 공감의 방식으로 언어를 쓴다기보다는 오히려 규율, 언어의 규율, 약속된 것들을 깨뜨리면서 계속 저만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가지는 힘은 그런 것 같아요. 결국에는 개인이 개별성에 기반해서 고유한 언어를 획득했는데, 그것이 보편성을 가질 때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사실 시의 공공성을 말할 때는 시를 쓰는 행위 자체 안에 공공성이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이미 그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고 그 이후에 독자로부터 발생하는 게 시의 공공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번째 질문은 제가 아무래도 시를 쓰면서 건축을 또 전공을 하다 보니까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아요. 시와 건축의 관계에 대해서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말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제가 이번에 경관이랑 조경이라는 내용을 보면서 시가 건축보다 조경을 훨씬 닮아있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점에서 그랬냐면, 제가 설명을 매번 실패하곤 하지만 열심히 설명을 해보자면, 저는 시와 산문의 글쓰기 차이를 설명할 때 산문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그 공간이 있으면 그것을 언어로 빽빽히 아주 친절한 방식으로 최대한 메우는 글쓰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시는 오히려 빈 공간을 의식하면서 돌을 놓는 작업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독자들한테 채워진 공간의 방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지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가기 때문에 시가 훨씬 읽기 어렵고 난해한 장르로 인식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어떤 쓰기의 방법론, 그런 쓰기의 방식에 있어서 저는 건축보다는 조경이 시간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있고, 진짜 변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고, 자연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시각, 변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짓는, 그러니까 시를 짓는 것, 그리고 조경을 하는 것의 어떤 행위가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 번째 질문은 시와 조경을 함께 말할 수 있는 매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거든요. 핀란드 건축가인 유하니 팔라스마가 쓴 『건축과 감각』이라는 책이 있어요. 영문 제목은 The Eyes of the Skin이거든요. 어떤 내용이냐면, 현대의 건축이 굉장히 시각이 우세한 형태로 발달해 있는데 사실은 그 공간 안에서 사람이 존재의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을 억제시키고 피부로서 공간 존재를 인식한다, 그것이 조금 더 담론화 되어야 한다는 그런 내용이거든요. 저는 시를 쓸 때도 몸에 대한 감각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김수영의 유명한, 그런 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 대한 어떤 것도 있고요. 얼마 전에 그리핀 문학상을 수상하신 김혜순 시인의 시론을 빌리자면 시를 '쓴다'고 표현하지 않고 '한다'는 표현을 쓰시거든요. 그래서 결국에는 강조의 방식,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의 쓰기가 아니라 시 안에서 화자가 되어서 시 안에서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는가 그 화자가. 결국에는 그게 몸의 감각을 내세워서 말씀을 하시는데요, 저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으로서 시와 조경 사이의 어떤 걸 찾는다고 했을 때 산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경관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어떤 행위를 우리가 산책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산책이 갖는 특성 중 하나는 시와 닮게 무목적성, 어딘가 목적지 없이 걷는 것 자체에 기반한 개념이기 때문에 저는 산책이 시와 조경의 사이를 잘 연결해줄 수 있는 개념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건축을 전공하니까 조경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듣고 생각하면서, 한 번도 단어의 정확한 뜻을 찾아보지 않았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찾아봤는데 경관이라고 할 때 ‘경’ 자, 조경이라고 할 때 ‘경’ 자가 ‘볕 경’자더라고요. 조경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저의 어떤 시선에서 보자면 조경이라는 단어가 이것도 굉장히 시각에 우세해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조경이란 학문을 깊이 있게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이 봤을 때 되게 시각적인 어떤 직업이라고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은 ‘시를 하다’라고 말을 하듯이 조경도 단순히 조경을 디자인하다, 설계하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훨씬 더 많은 동사를 붙여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임한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두 분 말씀을 들으니까 저희 프로젝트가 어떻게 보면 조경 그리고 예술 사이의 관계를 모색해 본다는 컨셉을 잡고 시작했는데, 관계를 모색하기에 앞서 이 두 가지가 어떤 바깥 경계면을 갖고 있느냐, 외연은 무엇이냐, 이 질문을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 가지만 가지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들을 두 가지를 마주치게 함으로써 느끼게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는 사이에 집중을 했는데 말씀을 들어보니까 그렇다면 각각의 가운데에는 뭐가 있었나, 이것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10분 쉬고 본격적으로 토론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2부

임한솔   두 분께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두 분께서 시와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토대로 두 분을 이 자리에 모셨는데 각자 시 외에 다른 일상이 있으시잖아요. 조경 설계 작업도 하시고, 건축전문지의 기자로 활동을 하시기도 하고요. 그런 작업을 할 때 시라는 걸 내가 가지고 있음으로써 다른 작업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지 간단하게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이 질문에 익숙하실 것 같은 박세미 선생님부터 말씀을 청해볼게요.

박세미   저는 시를 쓰는 것과 건축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는 것을 굉장히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시는 굉장히 내밀한 작업이기도 하고 좁은 공간에서 좁은 것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작업인데요, 사실 저는 시를 쓰는 것이 건축 기자를 하는데 어떤 큰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거꾸로 건축을 배우고 건축가의 어떤 시선을 빌리는 것이 시를 쓰는 데 훨씬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떤 텍스트에서 '공간을 다루는 사람은 조물주의 후손 같다'는 비유를 쓴 적이 있는데요, 일반 사람들이 보지 않는 높이, 건축가는 사실 가구부터 도시까지 굉장히 큰 스케일을 다루고 여기 텍스트에도 조경가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정말 많은 클라이언트부터 여러 가지 주체들을 상대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갖게 되는 광활한 시선, 약간 넓은 시선들이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쓰면서 저는 그런 높은 곳에서 보는 시선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고요. 또 건축 기자를 하면서 쓰는 기사라는 것이 굉장히 관용적인 글쓰기잖아요. 그런데 저는 일종의 시를 쓰다 보니까 뭔가를 얘기할 때 일반 신문 기사에서 흔히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약간 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개인의 언어를 상정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그 정도인 것 같습니다.

임한솔   저는 사실 요즘에 시를 쓰거나 시집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는데 예전에 습작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저한테 시는 그런 것 같아요. 가장 정확한 언어. 그러니까 '요약할 수 없다'는 말이 저는 꽤 와닿았습니다. 가장 정확해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날카롭고 가장 대체할 수 없는 말이 시가 아닐까. 제가 말을 다듬는 것을 처음에 시를 쓰는 친구들이랑 같이 배우다 보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는 이수학 소장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수학   제가 공부할 때 경관이 뭐냐고 누군가 질문했을 때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하셨어요. 경관이라는 건 네가 감각하는 모든 것이다. 사실은 그때까지 경관이란 말이 되게 어려웠거든요. 우습게도 제가 학교 다닐 때, 학부 4학년 내내 경관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되게 재밌죠. 그때 경관이라는 말은 굉장히 학술적인 용어처럼 인식이 됐고 그것을 정확히 가르쳐주거나 하는 선생님들도 없더라고요. 그런 수업 과정도 없었고 오히려 저희들은 공간 기술자로서 키워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왜냐하면 다른 걸 할 게 너무 많기도 했고. 그래서 이제 졸업하고 나서 경관이라든가, 논문을 읽어보니까 그런 말들이 나오더라고요. 나중에 다시 공부하면서 선생님한테 물었을 때 그 얘기를 듣고, 그 한마디로 저는 다 그냥 이해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어렸을 때 읽었던 시집들.

좀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시를 쭉 읽다가 장정일의 햄버거에 관한 명상 이후로는 시집을 읽지 않았거든요. 저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 많을 거예요 그분이. 장정일 이후에 태어난 시인들의 시는 읽지 않겠다, 그냥 그랬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겠죠. 최근에 다시, 사무실 근처에 시집 서점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이제 시집을 사서 다시 읽는데 다들 젊은 시인이죠. 최근에는 시인이자 책방 주인한테 조건을 걸었어요. 20대 이하의, 남자 아닌 사람의 시집을 골라줘라. 여덟 분을 골라주더라고요. 읽었는데 반은 이해 못하겠더라고요. 좀 어렵더라고. 시집 몇 개를 사서 봤는데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이게 무슨 일이지. 그래서 부탁해서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아마 제가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그런 모든 감각이나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건 겸허히 받아들이는데 어쨌든 시가 저한테 줬던 가장 큰 영향은, 시가 그렇잖아요. 모든 감각에 초연하잖아요. 그리고 아주 다시 정교하게 언어로 짜여서 나온 것이 시인데 어렸을 때 읽었던 그것이 경관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임한솔   그러고 보니 공간감이나 장소감이라는 말은 쓰는데 경관감이라는 말은 전혀 못 들어본 것 같아요. 경관이라는 말에는 '감'을 따로 쓰지 않아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상태로 우리가 이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아마 선생님께는 시라는 것과 경관이라는 단어가 어울려서 같이 이해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시와 경관을 이해했던 그 부분을 얘기하셨을 때, 다른 시인들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겠다라는 부분에서 저는 선생님께서 예전에 오규원 시인을 언급하셨던 것이 생각났어요. 이와 관련해서, 제가 발제를 준비할 때 제일 처음에 해보고 싶었던 작업은 시어를 조탁하는 방식을 경관을 만드는 방법으로 응용해서 설명하는 것이었거든요. 불가능한 과제겠지만 어떤 방법론의 측면으로 우리가 접근했을 때 ‘이렇게도 볼 수 있겠네’라고 하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을 열어봤습니다. 봤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됐어요.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사례를 들어 설명을 하는데, 심지어는 공원에 관한 시가 예시로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사실은 전혀 도움이 안 됐습니다. 그렇다면, 시라는 것을 쓸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의 법칙이라는 게 없고, 그것이 없기 때문에 선생님께 어떤 최근의 감각으로 쓰인 시들은 읽히지 않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드는데, 혹 제가 말씀드렸던 그런 과제가 가능할까요? 시어를 쓰는 방법을 조경 설계 언어로 적용한다, 이런 게 가능할까요?

이수학   요즘 하는 일 중에 설계했던 것들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있습니다. 물론 제가 했던 작업에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들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조경이라고 하는 게 건축하고 비교해 보면 뭐라고 그래야 될까, 부서지기 쉬운, 사라지기 쉬운 그런 조건 하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경, 불도저 10cm 집어넣어서 반나절 긁으면 흔적도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사실 많이 그렇게 없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실은 그 조경이 만드는 그런 공간, 경관 이런 것들은 굉장히 많은 동력이 들어가거든요. 만들어지고 나서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햇빛과 비와 바람, 시간. 이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건데 그런 걸 없애는 건 순식간이거든요. 특히 한국 같은 사회, 뭐랄까 자본에 의해 쉽게 공간이 바뀌는, 서울만 해도 그렇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조경이 지속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작업들, 공간들 이런 것들이 지속되기가 되게 어렵지 않은가 싶어요.

그리고 사실은 이 왜곡이 만들어질 때,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왜곡이 일어나요. 설계 도서랑 다르게 한다는 얘기죠. 그리고 만들어진 직후에 바로 또 변형이 되고, 그리고 쉽게 사라져버리는 이 상황에서 그러면 내가 설계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뭔가 고민하다가 제가 찾아낸 게 '그럼 글을 쓴다'에요. 물론 그림도 그리는데 그림은 말고 글을 써 보겠다 해서 쓰고 있는데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걸 따로 이름 짓기를 '말 설계다'. 그런데 그림으로, 손으로 하는 설계와 '말 설계'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아마 오규원 시인의 시작법을 통해서 설계로 가는 어떤 접점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말 설계는 재료는 똑같지만 말, 단어, 문장 그리고 그 구조들이 가지고 있는 그 체계가 같은 거 같은데 다르더라고요. 해보니까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접점을 찾기는 좀 어렵다. 그래서 아주, 어렵게 쓰고 있습니다.

임한솔   이 부분과 연결해서 다시 얘기해 볼 만한 부분이 박세미 선생님께서 '건축이 소설이라면 조경은 시에 가깝지 않을까' 이렇게 말씀하신 문장인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조경에서 정원이 시라면 공원은 소설이 아닌가.' 정원 같은 경우는 상징의 모음집이잖아요. 정원이 원하는 것들을 여러 개 배치하고 그 점적인 것들이 모여서 어떤 깊이를 만드는 거라고 하면, 공원은 사람들이 선적으로 움직이거나 여기서 저쪽으로 갈 때 어떤 경험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논리에 더 가까운 공간인 것 같아서, 그런 측면으로 보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하신 그런 부분으로 생각했을 때 조경의 특징이 더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조금 더 나누고 싶은데, 이수학 소장님께서는 '건축은 산문, 조경은 시' 이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이수학   건축은 산문, 조경은 시.

임한솔   네. 산문이 꽉 채우는 글쓰기라고 하면 시는 공백에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성의 측면으로 봤을 때, 우연의 집합으로 본다면 건축보다는 조경에서 더 변화가 많기 때문에 시에 가깝지 않을까 이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이수학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개개인의 성향이 문제가 아닐까. 장르의 문제가 아니고요. 건축이라는 장르와 조경이라는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가 누구의 성향, 조경가 누구의 성향,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면 제가 아는 건축가 중에서 건물을 앉힐 때 조경가보다 훨씬 더 자연하고 같이 잘 어우러져서 적절하게, 시간이 지나도 때가 타도 그냥 자연에 있는 바위처럼 하시는 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건축가도 계시고요. 조경도 마찬가지예요. 조경도 어떤 분이 만든 공원이 됐든 정원이 됐든 저는 그런 부분은 없는 것 같아요. 아주 구축적이고 만들어질 당시의 화려함, 반짝반짝함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멋진 공간으로 변하는 그런 조경하시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그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임한솔   사실은 1대 1로 대응을 시키는 게 도식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불편한 느낌이 있긴 있지만, 저는 그렇게 관찰했을 때 그런 시선도 상당히 뭔가 발굴해주는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거꾸로의 비유도 가능할 것 같아요. 건축이 시고. 조경이 산문이다는 비유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이수학   근데 이번 세미나의 주제가 조경과 무엇이기 때문에 그런 거는 있지만 곰돌이 이야기책에서처럼 곰돌이는 그냥 곰돌이가 되고 싶은 게 가장 좋지 않나..

임한솔   다음으로는 이 얘기를 꼭 해보고 싶은데요. 그래서 시와 경관 혹은 공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그 문제에 있어서 이수학 소장님의 토론에서는 10경의 예를 들으시고 루카치를 언급하시면서 오래 전에는 그것들이 뭔가 통합된 상태로 움직이는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현대 조경, 현대 시에서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좀 유리된 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혹은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떻게 보면 회복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을까, 따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갔을 때 갖출 수 있는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지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연관해서 박세미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시’라는 것이 발제문에서처럼 경청과 공감의 영역에만 있는 게 아니고 실질적으로는 어떤 경험을 바꿀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지점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시와 경관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같이 뭔가 변화를 추동하고, 시가 경관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경관이 시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이런 실천이 굉장히 많이 있지 않았나, 그것이 시 진영에서도 목소리가 있고, 경관의 진영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있지 않았나 하고요. 두 말씀을 제가 이해한대로 종합을 해봤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시의 공공성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시의 공공성이 위치하는 자리가 경청과 공감의 관점에서 보면 시인이 듣는 행위에 있을 것이고, 그런데 박세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고유한 표현을 획득하는 것, 그것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생각을 깨버리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표현의 측면에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요. 이수학 소장님께서는 '시적 조경'이라고 했을 때 그 '시적'이라는 게 어떤 대상지를 이해하는 측면에 조금 더 방점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실까요, 아니면 그것을 뭔가의 표현으로서 얘기하는 데 방점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실까요?

이수학   예전에 자그마한 책을 쓰면서 이런 말을 인용한 적이 있어요. 황지우 시인이, 지금은 분명히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시적인 것,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선적인 것'을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시가 시를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말고 시가 선(禪), 그것을 생각한다면 다른 시가 쓰이지 않을 까라고 후기처럼 쓴 문장이 있는데 그것을 읽고 나서 조경이 조경하듯이 하지 말고 조경을 시 쓰듯이 한다, 시가 이야기하는 풍경을 그려내도록 하면 어떻겠느냐 해서 ‘시적 조경’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조경을 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였던거죠. 사실 우리가 설계하다 보면 되게 말이 많아지거든요. 자주 구차해지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다 비워냈을 때는 과연 어떤 조경, 아니고 어떤 조경을 통한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정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아까 그 잠깐 이야기하신 박세미 선생님께서 이야기한 시의 보편성 그것은 조경에도 되게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조경이 작가주의를 표방하지만, 사실 한국 조경에서는 작가주의를 표방하지만 작가라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들이 되게 극히 드물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놓고 보면 한국 조경은 보편성의 총화라고 할 수 있죠. 보편성 그 자체인 조경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런 보편성 말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말고 진짜 보편성. 사람들이 정말 좋은 거를 몰랐는데 좋은 거를 느끼게 해 주는, 감각하게 해 주는 그런 조경이 필요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어서 박세미 선생님의 말씀에 많은 공감이 됩니다.

임한솔   ‘시적인 조경’이라는 게 만약에 가능하다. 그런 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 이렇게 전제를 한다면, 박세미 선생님께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조경 대신에 건축을 가지고 말씀을 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익숙하기도 하실 것 같고 사실은 비슷한 논의가 아마 조경이나 건축이든 있었겠죠. 한편으로는 기자 생활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을 많이 접하셨잖아요, 그런데 많은 건축 프로젝트에서 공공성이라는 건 사실 어떤 창작이나 표현의 수준보다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기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가 이런 것에 초점을 둔 것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다른 쪽으로 평가받는 게 많을 텐데 그런 것을 고려했을 때, 시적인 조경이라고 했을 때 그 '시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풀어볼 수 있을까요.

박세미   결국에는 감각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이수학 소장님이 방금 말씀하신 내용이랑 결국 같은 내용일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좋은 건축, 좋은 공간, 좋은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에서 너무 습관화 되어 있고, 관념화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드러내 주기도 하고 다른 매체를 통해서 다시 발견하게 하거나, 낯설게 하거나, 그런 방식을 통해서 결국에는 아예 없던 감각을 새로 만든다기보다는 이 세계의 기존 질서 안에 가려져 있던 감각들을 다시 느끼게 하면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고유함을 재인식하는 것, 저는 이제 예술의 기능이고 건축의 기능도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결국에 동물과 인간이 구별되는 것은 사유하는 존재라고 얘기하긴 하지만 결국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저희는 지금 모든 생각도 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하잖아요, 그런 동물하고 결국에 구별될 수 있는 것은 그 무용한 예술의 기능, 나의 고유한 감각을 통해서 나의 고유성을 재인식하는 것, 그래서 건축이나 조경이나 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질서를 깨뜨린 새로운 감각을 얘기해 주는, 감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임한솔   감사합니다. 이제 객석에서 Q&A를 받아서 궁금한 점이 있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질문이 하나 올라와서 이 질문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수학 선생님께 질문이 있는데요. 이수학 선생님의 스승님께서는 경관은 너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수학 선생님께서는 현재 경관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또 저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경관을 단순히 만들기만 하는 기술자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공부와 설계에 임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당시의 문제 의식에 대해, 지금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답을 되돌려 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수학   제게 선생님이 두 분이 계신데, 첫 번째 '너가 감각하는 모든 것이 경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저는 그대로 따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거겠죠. 나는 도대체 얼마만큼 감각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돌이켜 보면 제가 감각하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느끼지 못하는 게 되게 많고요. 앞으로 더 그런 감각을 어떻게 할지는 여전히 고민이죠. 그러니까 감각했다고 해서 다 설계에 반영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일단은 감각하는데 문제가 있고, 그 감각한 것들을 다시 이제 풀어내는 데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고, 그래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들을 실천할거냐의 문제는 두 번째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럼 조경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는 건 우스개로 하는 얘기고, 사실은 아마 박세미 선생님이 잘 아실 거예요. 대학 수업에서 시작법을 아무리 배워도 시를 쓸 수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설계 수업을 아무리 배워도 설계를 잘할 수 없는 것과 같죠. 그냥 일반인들보다는 잘하겠죠. 그런데 자기의 시를 쓴다는 것, 아니면 자기의 설계를 한다는 것, 설계에 국한되지 않고 조경이라고 하는 행위, 행위로서의 조경 그것을 하려면 결국은 이제 자기의 방식을 찾는 게 되게 중요하고 그렇게 자기의 방식을 찾는 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을 견뎌라, 이렇게 가면 일반적인데 어쨌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지금 여기 있는 네 분, 한솔군부터 지금 화면에 안 나오는 뒤에 계시는 분들 스텝분들 같은 경우가 아주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부 끝내고 어디 취직도 제대로 못할 때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이분들이 멋지게 해내고 있거든요. 조경을 한다는 것이 우리가 설계를 한다, 예전에 저 때만 해도 ‘조경한다’ 그러면 ‘설계한다’였거든요. 이게 같은 단어로 쓰였는데 그게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시를 쓰면서도 조경을 할 수 있고 영화를 찍으면서도 조경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방식 또한 다양하다는 거죠. 각자의 방식을 각자의 노력으로 찾아낸다. 그게 이제 중요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좀 이상한 이야기로 빠질 것 같아요.

임한솔   말씀 감사합니다. 이런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학생들이 뭔가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러지는 않겠지만.

이수학   절대로 그런 대답은 없죠. 세상에

임한솔   그렇다고 고뇌에 차서 그럼 어떡하지 이럴 거 같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이게 디자인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걸 어떻게 하면 더 해나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숙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한편으로 해봅니다. 질문이 하나 더 들어왔는데요, 질문이 아니고 정보를 전해주셨는데 이 말씀을 들어보고 저희 프로젝트와 관련된 공지와 함께 마지막 소감을 나누고서 오늘 세미나를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많이 어렵지만 잘 들었습니다. 이수학 선생님과 박세미 시인님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옛날에 출판된 일본에 조경용어 사전에 나온 경관의 정의인데 한 편의 시 같아서 공유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조경을 잘하나 봅니다.

경관: 양지와 음지, 그늘과 햇빛의 관계이고 시간의 추이로 풍경은 토지와 관계가 없다. 빛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늘의 빛(陰光)이 있고, 이것을 경(景)이라고 한다. 빛 가운데의 그늘을 영(影)이라고 한다. 영은 경의 다른 말이다. 빛이 눈에 비치고 사물에 반영되는 것, 이것이 원래 경관의 의미로 오늘날에는 풍경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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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산문 같기도 하고, 곱씹어 볼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늘을 가지고 빛을 설명하면서 '음광'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굉장히 눈여겨볼 만한 부분인 것 같고요. 그럼 Q&A까지 마무리를 짓고, 저희 행사에 공지 사항을 마지막으로 전해드리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조경과 예술의 관계를 모색해 보는 저희 세미나는 앞으로 12월까지 매월 둘째 주 수요일에 열릴 예정입니다. 다음 달 8월 12일에는 조경과 조각을 주제로 해서 신명진 선생님께서 발제해 주실 예정이고요. 오늘처럼 두 분의 토론자를 모시고 진행하려 합니다. 온라인 현장 참가자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받고 있습니다. 기존에 신청해 주신 분들께서는 다시 신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등록해 주신 연락처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온라인 현장에서 토론 시간이 조금 짧았다. 혹은 충분한 얘기가 안 되는 것 같다. 참 아쉽다거나 아니면은 업로드된 유튜브 영상 시청자 중에서 이 세미나 아니면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함께 의견을 나눠보고자 하시는 분들께서는 다음 주 월요일인 7월 19일 오후 7시에 저희가 오픈 피드백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세미나의 진행에 관한 것부터 토론 그리고 전반적인 기획에 대한 얘기까지 자유롭게 의견 나눠보고 싶습니다. 줌으로 진행할 예정이고요. 세미나처럼 홈페이지와 연락처를 통해서 링크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끝으로 저희 프로젝트 목표는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는 데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프로젝트를 통해서 다양한 시각과 시도들이 생겨날 수 있도록 관심 참여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박세미 선생님과 이수학 소장님 소감 한마디씩 듣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세미   조경이라는 단어를 늘 곁에 두고 살았는데 한 번도 조경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본질적이지만 필요한 질문에 대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이런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임한솔   감사합니다. 소장님도 말씀해 주세요.

이수학   이렇게 멋진 자리를 준비하고 진행한 여러분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남은 일정 진행 잘하시고 건승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임한솔   감사합니다. 오늘 세미나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