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쓰기의 시학〉에 대한 토론문 #1
이수학 / 아뜰리에나무 소장
축약된 근현대 조경의 시간, 베르길리우스가 괴테를 불러 휘트먼을 소개하는 자리에 마주한 주염계와 송시열이 안부를 묻는 사이로 플라톤이 데려온 바르트가 바슐라르를 호명하는 한솔의 발제를 듣는 시간이 조용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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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의 정의와 확장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까. 디자인이 형태적인 것을 너머 삶의 방식까지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를 확장했듯이 가장 나중에 생긴 경관이라는 말은 이전의 모든 용어를 흡수하고 거기에 정량적 가치 기준까지 내포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것이 경관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_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문장.
창덕궁후원의 십경에서 보여주는 것은 시가 노래하는 경관과 공간이 가진 경관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일치하는 완결된 구조를 가진다.
행위로서 조경과 감각적 또는 인식적 사실로서 경관 그리고 물리적 실체로서 정원이나 공원 또는 자연. 행위로서 시작詩作과 사물에 대한 시적 감각과 인식으로서 시심詩心 그리고 물리적 실체로서 문자화|문장화 된 시. 이 둘은 우리가 하나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 만난다. 이 시기에 시와 경관은 하나였다.
철학적 이념과 정치적 신념이 하나의 삶을 강제하던 시대가 엎어지고, 참조해야할 자연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신을 죽이다 못해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은 여전히 이어지는 시대. 시가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개인의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가 운율 맞출 시도, 함께 할 사랑도 어떠한 꿈도 사라진 파편화된 세계에서 시와 경관은 분리된지 오래다.
지금의 조경이 재현하는 낭만적 경관이란 얼마나 허구인가.
지평이 사라진 세계, 현실과 가상의 구분도 모호해지기 시작한 세상에서 낭만적 경관을 너머 다시 시와 경관이 하나인 세계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하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경관쓰기의 시학〉에 대한 토론문 #2
박세미 / 시인, SPACE 기자
시의 공공성이란 무엇일까?
- 경청과 공감
“플라톤에게 시는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공공의 삶에 기여한 모범적인 인물들, 즉 우리가 흔히 위인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교육적 기능을 수행할 때에만 그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지닌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의 무기능성이다”라고 말한다. 예술 작품은 아무런 ‘기능이 없다는 점(Funktionslosigkeit)’ 때문에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이 정치적 동기에서 앙가주망의 입장을 취할 경우 그것은 사회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총체적 연관 관계로서 작동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직접적 항의는, 전체로서 작동되는 사회가 형성하는 기능의 연관 관계의 희생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관에서는 시가 언어 표현의 극단성을 통해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사회구성원들의 타성적 감각과 관습적 사유를 파괴할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_ 진은영, 김경희, 「영화 < 패터슨 >에 나타난 시(詩)와 예술의 공공성」
“한 때 시쓰기란, 아니 문학이란, ”나는 이래. 너도 그렇지?“라는 공감, 어떤 정서의 전달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시를 통해 습관화된 감각과는 다른 감각을 촉발시키고, 나와 내 시를 읽는 사람들의 신체적 감각을 변화시키는 데 자꾸 관심이 가요. 이 시어를 이러저러하게 배치함으로써, 그것이 나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주는가? 우리들은 (스스로가 그 시도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 아닐까요? 즉 우리는 감각의 (비)문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의미의 문법으로 우리의 시들을 읽으니 어렵고 난해해지는 것 아닐까요? 의미의 소통을 추구하는 대신 감각적 촉발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이라는 언어적 전체 자체를 거부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듯 합니다.”
_김행숙, ‘진은영의 메일’, 『마주침의 발명』
“비유적으로 문학은, 등을 긁을 때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닿지 않고, 위로 긁는대도 아래로 긁는대도 닿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 것과 같이, 도저히 침투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따질 수 없는 어떤 공간에 대한 증명이고 그리움입니다.”
_김행숙, ‘이성복’, 『마주침의 발명』
- 고유성, 무용성, 무목적성 / 보편성, 공공성, 대중성
- 고유한 개인의 언어, 감각의 (비)문법을 획득할 때, 시의 공공성의 그 차후에 생성되는 것
시와 조경이, 산문과 건축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텍스트 직조의 성김 혹은 치밀함
- 불가능성이 개입되는 여지
- 통제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수용과 책임
- 무책임과는 다른 방식, 얼마나 정확함에 가까이 가닿는가?
(시의 경관화 & 시인으로서 조경가)
시와 조경을 함께 말할 수 있을까?
“거주하는 공간 안의 내면성으로 경험을 국한하지 않았을 때, 즉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주변적 peripheral이고 초점을 두지 않는 시야 unfocused vision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주제 또한 나의 흥미를 일으키는 분야이다. 공간성 spetiality, 내면성 interiority 그리고 촉감적 성격 hapticit을 아우르는 경험에 이르기 위해 주목할 만한 요인 중 하나는 날카롭게 초점이 잡힌 시야를 의도적으로 억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는 건축 담론의 장으로 좀처럼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건축 이론의 주된 관심이 여전히 초점을 두는 시야 focoused vision, 의식적인 지향성 intentionality, 그리고 투시도법으로 재현된 이미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촉감을 활용하는 형상화 imagery와 초점을 두지 않는 주변적인 peripheral 시야는 체험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들을 만들어 낸다. 초점을 두는 시야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맞서게 하지만, 주변적인 시야는 우리는 세상의 살 flesh ot he wold로 감싸준다. 시각이 가지는 헤게모니에 대한 비평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시각 그 자체의 가장 중요한 본질과 다양한 감각 영역들의 협력 가능성을 재고해야 한다.”
“나는 오늘날 일상적 건축에서 발견되는 병리학적 증상의 많은 측면들을 감각의 인식론적 분석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크게 보면 문화 일반, 구체적으로는 건축에 있어서 시각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현대의 건축과 도시의 비인간성은 우리의 몸과 감각을 방치한 결과이자, 감각체계의 불균형의 결과로 초래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과학기술 사회의 소외와 무관심, 고독감의 증가는 일정 정도 감각에 대한 병적 증상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현상들이 종종 과학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눈이 우세한 가운데 다른 감각을 억제하는 상황을 통해 우리는 무관심, 소외감, 외면성의 영역으로 밀려 난다. 눈이 중심인 예술은 분명 인상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많은 구조들을 생산해왔지만, 인간이 세계 속에 뿌리내리는 것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_ Juhani Palssasmaa, 『The Eyes of the Skin』
- 김혜순의 ‘몸의 시’론: ‘시 쓰다’가 아닌 ‘시 하다’
- 모든 ‘-하기’의 순간에 시인은 시를 위치시키고 거기로부터 무한한 세계를 열어젖힌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_아치볼드 매클리시, 「시학」
- 시와 산책 / 몸으로 쓰기와 읽기 / 몸이 풍경(조경)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나는 이제 더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_로베르트 발저,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