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쓰기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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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솔 / hsoll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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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과 옴스테드


1855
월트 휘트먼이 『풀잎』의 초판을 출판한다; 이는 1856, 1860, 1867, 1870, 1881, 1891-92년에 증보, 개정된다; 패니 펀, 『루스 홀』; 에버트 다이킹크와 조지 다이킹크가 『미국 문학 백과사전』을 출판한다; 브루클린이 윌리엄스버그와 부쉬윅을 합병해 미국 도시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 된다.

1857
디온 부시코트의 연극 < 뉴욕의 빈자들 >이 브룸 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 한켠에 있는 월랙의 극장에서 열린다; 프레드릭 로우 옴스테드와 칼베르 보가 센트럴파크의 설계권을 따낸다; 맨하탄 북부의 이 760에이커 구역에 살던 주민들이 퇴출된다; 이들은 세네카 빌리지의 노예가 아닌 흑인 거주민을 포함한다.

1861-65
남북전쟁


엄청난 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1850년대 후반의 뉴욕, 미국의 문학사와 조경사에 두 가지 기념비적 사건이 있었다. 각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 할만한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과 프레드릭 로우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1822-1903)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표작 『풀잎(Leaves of Grass)』(1855)과 센트럴파크 설계안을 낸 것이다.
 
뉴욕의 문학을 다룬 어느 개론서의 연표에는
 월트 휘트먼과 프레드릭 로우 옴스테드가 함께 실려 있다[1]. 뉴욕에서는 센트럴파크를, 문학에서는 휘트먼을 빼놓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위 인용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 배치와 행간에 의미심장함이 느껴진다. 휘트먼의 『풀잎』은 초판 이후 약 40년 간 개정되었는데, ‘민중의 대변인’이라는 수사에서 엿보이듯 그의 개정 작업은 사회상과 긴밀한 연관을 맺었다. 독립을 선언한 1776년으로부터 100년도 채 안되어 미국 문학 백과가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그간의 활발한 문학적 시도들과 ‘미국성’에 대한 정립 의도를 엿보인다. 그 와중에 뉴욕의 도시화는 또 한번의 계기를 맞는다. 2년 후 브로드웨이에서 ‘빈자’를 다룬 연극이 공연되고, 옴스테드와 센트럴파크가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예가 아닌’ 흑인 거주민이 퇴출되었다는 점이 특기된다.
 
말하자면 센트럴파크의 설계안은 급속한 산업화[2]와 도시화의 자장 아래, 남북전쟁이 터지기 직전, 빈자와 흑인이 대변하는 민주화 이슈 사이에서, 휘트먼의 시적 자아가 막 발화했을 때 즈음 발표되었던 것이다. 『풀잎』과 센트럴파크 사이의 행간을 채우는 이러한 사건의 연쇄, 혹은 시기적 중첩은 단순한 우연에 그치지 않는다. 첫 시집을 내기 전 뉴욕 중소 신문사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던 휘트먼은 1840년대 브루클린의 포트 그린 공원화를 비롯해 뉴욕의 열린 공간 조성을 촉구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3]. 시인으로서 활동한 이래 공원이 중요한 시적 소재로 자리하지는 않았지만 휘트먼은 이후에도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뉴욕의 공원에 대해 산문으로써 의견을 밝혔다.
 
휘트먼이 일찍이 상상했던 열린 공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활동하고 특히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곳이었다. 그러나 완공된 센트럴파크에 휘트먼은 실망하고 말았다. 센트럴파크를 설계한 옴스테드의 미학은 도시와 자연의 이분법과 대비 효과에 기반한다. 또한 도시 생활의 나쁜 영향을 자연 체험의 좋은 영향으로 치유한다는 개념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조작된 자연을 통해 ‘예의바름과 자제력, 절제’를 가르치고 부랑자와 이민자처럼 다수에게 위협적인 계층의 거친 마음을 다스리고자 계획된”[4] 센트럴파크와 같은 공원은 휘트먼의 관점에서 “경관을 민주화하는데 실패했다.”[5]
 
공원을 통해 도시의 문제를 계획가의 입장으로 해결하고 그 방책으로 픽춰레스크 미학의 재현을 택했던 옴스테드와, 분주한 도시인의 일상을 느린 시선으로 포착하고 시로 옮기며 미국의 정체성과 민주주의를 사유했던 휘트먼의 입장은 여러모로 다르다[6]. 그러나 일상을 강조한 휘트먼의 공원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옴스테드의 반면으로서 유효해 보인다. 도시를 자연으로 가리기보다 곳곳을 살피는 전망을 중시하며, 자유롭고 활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구하는 그의 관점은 센트럴파크에서 탈피한 차세대 공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바니스트 시학(urbanist poetics)[7]으로 불리기도 한 휘트먼의 문학관은 정원술의 전통과 계획적 사고가 외면했던 현대 도시 조경의 본질을 비춰낸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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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프레드릭 로우 옴스테드(출처: The World's Work: A History of Our Time, Volume VI, New York: Doubleday, Page & Company, 1903.)

약 50세의 휘트먼(출처: Henry Bryan Binns, A Life of Walt Whitman, Methuen & Co., 1905.)

설계와 시 쓰기
 
시대와 지역,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념까지 공유했던 두 사람의 공원관이 완전히 달랐던 까닭은 무엇일까. 시인과 조경가라는 두 사람의 직업을 놓고 생각해보자. 직업은 행동 양식을 결정한다.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었던 휘트먼은 글쓰기를, 조경가였던 옴스테드는 설계를 일삼았다. 행동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쓰기와 설계라는 작업 방식의 차이는 삶(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시작했던 휘트먼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시선은 서서히 시인답게 변모했을 것이다. 구독자와 마감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표현에 집중하는 글쓰기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시를 부르는 마음, 시심은 목적의식에 반응하지 않는다. 흔히 ‘관조’라고 불리기도 하는 어떤 무목적성은 사물의 겉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통찰의 힘을 발휘한다. 반대로 설계는 반드시 목적성을 띤다. 의뢰인의 요구나 공모 요강, 현실 여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의뢰인을 만족시키지 못하거나 공모에 당선되지 않으면 대부분의 성과는 사라져버리고 식물의 활착이나 우수 배출에 실패하면 존재 가치를 의심받는다.
 
목적성의 유무는 경관을 바라보는 태도를 다르게 한다. 목적이 있으면 선택과 집중을 추구한다. 해결할 문제를 정확히 찾아서 알맞게 집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적이 없으면 우연과 발견을 추구한다.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줄 흥미로운 사물이나 사건을 마주치고 그로부터 새로운 발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목적성의 유무는 실용의 여부와도 연결되는데, 시는 보장된 공익적 기능이 없기 때문에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하여지기도 했고(플라톤), 그로 인해 고유의 존재 의미를 얻고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되기도 했다(아도르노). 시와 설계를 예술과 디자인으로 확장해 이해한다면, 그 논의의 양상이 매우 넓을 뿐 아니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시 쓰기’라는 행위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시를 쓰는 것은 사적인 행동이고 그 결과물 또한 시인의 감정 표현에 그친다고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시 쓰기는 기본적으로 관찰과 경청을 동반한다. 일상에 귀 기울이는 시인에게 시 쓰기는 “가장 작은 소음과 신음을 듣고도 증폭시켜 자기 자신과 타자들 모두에게 잘 들리도록 만드는 “확성기처럼 생긴 글자”를 쓰는 일”[8]이다. 이 지점에서 휘트먼의 시가 공공에 기여하는 방식이 옴스테드의 설계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설계의 공공성이 설득의 과정에 매여있는 그때, 시의 공공성은 공감의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설계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단언은 다소 불편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시 쓰기는 타인의 검열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시인이 쓰는 문장은 예술의 이름 아래 어느 정도 권리를 보장받는다. 휘트먼이나 영화 < 패터슨 >의 패터슨 같은 경청의 시인보다 도취의 시인을 더 많이 봤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설계가의 안이 실제 공간으로 구현되기까지에 예정된 난관은 옴스테드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과업지시서가 제안에서 실시도면을 거쳐 시공되기까지, 설계가가 경청하고 공감하며 호흡을 맞춰야 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이다. 시인은 순간을 수집하지만 설계가는 순간을 마주한다. 경청의 예술가라면 오히려 시인보다 설계가가 아닌가 물을 수도 있다. 한국의 조경 잡지 콘텐츠에서 작품론, 작가론에 비해 장르론이 절대 우위[9]인 까닭도, 어쩌면 경청하다 작품과 작가의 존재감이 흐려지고 마는 설계의 현실 때문일지 모른다.
 
행위의 측면 외에도 설계와 시 쓰기는 결정적으로 각각 언어와 경관을 매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설계에서 글이, 시 쓰기에서 경관이 차지하는 위상도 만만치 않지만 최종 결과물이 드러나는 방식 차이는 두 분야의 거리를 한층 멀게 벌려놓는 듯 하다. 시에서 생태는 가치이자 지향이지만 조경에서 생태는 패치와 코리더 개념을 선으로 구현한 후 환경영향평가로써 검증을 받아야 하는 항목이다. 생태와 예술의 이원 구도가 현대 조경 담론의 전통적 화제가 되어버린 현재, 언어 예술인 (시)문학과 경관 실천인 (조경)설계 사이의 간극을 좁힐 생각의 고리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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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이라는 텍스트
 
“인류가 경관을 묘사할 언어를 갖기도 전에 사람들은 경관을 만지고,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살고, 이루었다. 경관은 인류의 첫 텍스트였으며 다른 기호나 상징을 발명하기 전부터 읽어냈다.”[10] 창밖에 천둥소리가 들리거나 땅에 그림자가 사라지면 우리는 곧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아챈다. 굳이 호칭을 쓰지 않아도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말과 글이 없어도 우리는 소통할 수 있다. 경관은 몸과 세계 사이에 위치하며, 언어가 발생하는 원천이자 배경이다.
 
경관이 언어의 원천인 것은 오래 전의 일만은 아니다. 지금도 경관은 말과 글의 자원을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이러한 까닭에 경관은 그림, 조각, 음악, 연극을 비롯한 각종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고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특히 경관(landscape)은 환경(environment), 장소(place), 공간(space)과 같은 인접어들과 비교했을 때, 단어에 내재한 감각-행위의 관념으로 인해 시적(poetic)이나 예술(art)과 같은 단어와의 친연성이 훨씬 높다[11].



아래는 Google Books Ngram Viewer에서 landscape, environment, place, space와 poetic, art의 친연성을 추적해본 결과.
단독으로는 인접어에 비해 적은 빈도를 나타나던 landscape가 poetic, art와 붙였을 경우 역전된 빈도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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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environment, place, space’의 빈도를 비교한 결과

각 단어 앞에 ‘poetic'을 붙여 빈도를 비교한 결과

각 단어 뒤에 ‘art’를 붙여 빈도를 비교한 결과

 
문학과의 친연성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경관은 인류의 첫 텍스트”라는 앞선 인용문의 한 구절을 소환해보자. 텍스트는 “쓰여진 모든 문서나 인쇄된 문헌을 지시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논문 이후로 전혀 새로운 위상을 갖는다[12]. 텍스트의 원 뜻은 ‘직물’이며, 한 필의 천이 씨실과 날실의 교착으로 짜이듯 다양한 요소의 착종체를 뜻한다. 작품 개념에서 작가는 틀을 만들고 독자는 그것을 수용할 뿐이지만 텍스트 개념에서 독자는 쓰기와 읽기의 상호 관계를 의식하고 공동 집필자처럼 그 의미 생성에 참가하는 생산 주체가 된다[13].
 
바르트 이후의 텍스트 개념이 보이는 의미의 복합성과 독자의 능동성은 경관을 텍스트로 바라볼만한 근거를 제공한다. 번역어 ‘경관’의 원어 ‘landscape’는 ‘land’와 ‘scape’로 이루어져 있다. 'land'의 오래된 쓰임에는 사람을 포함한 (농업 중심의) 생활 구역이란 뜻이 담겨 있고, 'scape'의 어원을 좇으면 무언가를 형성한다는 뜻(-scipe)과 연합된 것(-ship)이라는 뜻과 연이 닿는다. 16-17세기에 이르면 landscape는 풍경화에서의 용례와 결합되어 보다 시각적이고 양식적 특질을 갖는 쓰임을 새로 갖게 된다. 즉 경관의 의미는 다층적일 뿐 아니라 맥락에 따라 결, 그리고 짜임을 달리하곤 하는 것이다.
 
경관이 텍스트라면 그 해석은 텍스트를 읽는 일, 조경은 텍스트를 쓰는 일이다. 지리학에서는 이미 경관에 사람들의 개인적, 집합적 저작권이 찍혀 있다는 의미에서 ‘저술된 경관(authored landscap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경관이 사회경제적 변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고유한 형성 과정을 갖는다는 뜻에서 ‘경관의 전기(biography of landscape)’라는 말을 쓴 바 있다[14]. 조경과 관련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경관 서사(landscape narrative)’라는 단어에서 엿볼 수 있듯 경관에 이야기 구조를 도입하는 방식은 실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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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landscape architecture)에서 경관(landscape)을 텍스트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얘기했다면, 건축(architecture)을 ‘쓰기’로 번역하는 것은 어떠한가.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플라톤 이래의 서양 철학을 ‘건축에의 의지’로 규정하고, 바르트가 논문을 발표한 1970년대에 지배적 은유로서 텍스트가 건축을 대체했다고 말한다[15]. 그의 견해에서 건축은 견고한 구축, 규범과 체계에 다름없다. 시계를 잠시 19세기 중반으로 돌려보자. 당시의 조경은 어쩌면 ‘풍경화의 구축’으로 번역되던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풍경화는 경관을 거쳐 텍스트로, 구축은 건축을 거쳐 쓰기로 다시 번역해보자. 조경의 결과물은 무너지지 않는다. “인간은 경관의 유일한 저자가 아니”며[16], 설계가가 쓰고 자연이 지우기도, 자연이 쓰고 설계가가 지우기도 한다. 텍스트로서 경관은 특정 저자가 일방적으로 쓰기보다 여러 저자가 끊임없이 읽고 쓰는 과정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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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경관화

개념에서 현장으로 초점을 옮겨보면, 시와 조경이 관계를 맺은 역사는 근대 이전으로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조경이라는 직능이 등장하기 이전의 조경 행위에서 문학은 보다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정원가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와 윌리엄 쉔스톤(William Shenstone), 정원애호로 유명한 독일의 시인 괴테(Goethe)는 두 분야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다. 이탈리아의 빌라 란테(Villa Lante)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주제로 삼았으며 영국의 스타우어헤드(Stourhead) 정원은 역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Aeneid)」를 재현했다[17].

 
시와 조경의 동반은 비단 서양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의 정원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인 사각형 연못은 중국 송대의 신유학자인 주렴계와 주희가 각각 연꽃과 방당(方塘)을 읊은 시를 모티프로 한 것이며, 굽이치는 계곡에 이름을 붙이고 예술 감상과 휴식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구곡 문화 역시 주희의 무이구곡을 담은 글과 그림에 연원을 둔다. 문자를 다른 매체보다 우위에 뒀던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조경 행위는 늘 문학, 특히 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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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건국의 기초를 다진 영웅 아이네아스의 일대기를 다룬 서사시 「아에네이드(Aeneid)」를 재현한 스투어헤드 정원의 전경. 동선을 따라 걸으면 「아에네이드」의 장면들을 순차적으로 만나도록 설계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따 경영한 화양구곡과 암서재(출처: 문화재청, 『한국의 명승』, 2016, 601쪽)

 
그렇다면 시를 경관으로 구현하는 실천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여기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얽매이지 않고 서사까지 생각을 연결해보면 다양한 방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매튜 포타이거(Matthew Potteiger)와 제이미 퓨링턴(Jamie Purinton)은 그 전략을 이름짓기(naming), 배열하기(sequencing), 드러내고 감추기(revealing & concealing), 머금기(gathering), 열기(opening)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18]. 그에 따르면 이름짓기는 사물에 과거의 기억과 기념, 미래의 지향으로 이어지는 정체성과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배열하기는 요소들의 배치나 시각장의 조절을 통해 변화를 느끼게 하고 이야기의 흐름과 강약을 구현하는 것이다. 드러내고 감추기는 땅에 깃든 역사를 발굴하거나 노출 여부를 통제함으로써 대상지에 대한 해석을 경관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머금기는 세계관이나 신화와 같은 서사를 알레고리나 환상, 기념, 수집 등을 통해 공간화하는 것이다. 열기는 이미 결정되어 닫혀 있는 서사를 지양하고 동시대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살아있는 서사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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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짓기부터 머금기까지의 네 가지 전략은 조경과 공원이 탄생하기 전부터 으레 쓰이던 기술이다. 물질문화/정신문화의 구분에서 전자의 비중이 높을수록 정원 양식이나 형태 요소가 발달하고 후자의 비중이 높을수록 조형보다 해석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쓰기’와 관련하여 현대 조경 실천에서 주목할 부분은 ‘열기’이다. 동시대에는 완결된 문학 작품을 설계로써 재구성하는 기회보다 스스로를 강변하지 않는 숨은 맥락, 즉 대상지 주변의 기억과 일상을 살펴 말하게 하고 경관화(해야)하는 기회가 많다. 주민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 설계에서 설계안에 대한 의견 나눔 못지않게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어 나누는 과정이 점차 많아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으로서의 조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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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조경가, 쓰기와 설계는 다르다. 그런데 그 다름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다듬으면 너머의 ‘다름’을 볼 수 있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역사적 지평과 현재적 지평이 만나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이 일어난다고 보았다[19]. 그에 따르면 지평과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이루는 것이 ‘이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해할 때마다 기존의 지평을 재구성하는 일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라는 지평은 조경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 어떤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 마사 누스바움은 논리와 객관의 화신인 재판관에게 문학을 읽을 것을 권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20]이다. 누스바움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또 그들의 경험과 마주하게”[21] 하는 까닭으로 공리적 사유와 함께 문학적 상상력의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힘주어 말한다. 건축가 정기용이 공학 기술을 중시하는 건축 문화 속에서도 “시적 상상력의 사회화”에 앞장섰고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그를 “공간의 시인”으로 부르는 관점도 이와 멀지 않다[22].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기 어려운 만큼, 문학의 가치와 덕목에 대해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글에서 출발점으로 삼은 휘트먼처럼 사람들의 일상을 고르게 눈여겨보고 귀기울이는 마음가짐을 시인의 덕목으로 꼽아보면 어떨까. 시 쓰기는 작고 가려진 것들을 경청하고 그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음을 동반한다. ‘공적인 시(public poetry)’[23], 혹은 ‘시의 공공성’[24]으로 일컫기도 하는 이러한 경향성은 내밀한 감정과 바깥의 현실을 연결하는 시 쓰기의 본질과 밀접하다. 휘트먼은 시인이 “재판관이 아니라 무력한 것들에 내리는 햇빛처럼”[25] 판단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에서 태양과 무력한 것들 사이에는 차양이 없고, 햇빛은 말없는 사물 위로 조용히 내린다.

 
문학 행위가 사물과 거리를 둔 채 의미나 상상의 차원에서 관계를 맺는다면 조경의 언어는 사물을 직접적으로 조작하고 다룬다. “정원은 땅에 대한 인간의 헌사”[26]이고 “조경은 땅에 쓰는 한편의 시”[27]라 표현한 조경가 정영선의 말을 이 지점에서 되새겨보자. 그에게 땅은 시의 지면이고 때로는 독자이다. 땅은 조경의 언어에 해당하는 지형 조작이나 식재, 포장 등을 가능하게 하는 부드러운 그릇인 동시에 조경 행위를 느끼는 주체인 것이다. 조경은 자연을 바라보는데 그치지 않으며 만지고 바꾼다. 조경가 조지 하그리브스가 ‘경관 프로세스의 시인’[28]이라 묘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하그리브스의 설계는 바람이나 중력처럼 가시화되지 않는 자연에 주목하며, 원자연의 형태를 모방하지 않고도 자연의 원리를 재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지면이자 독자인 땅의 균형을 설득력 있게 이루어낸다.

 
땅에 관한 논의를 만들어진 환경의 관점으로 옮겨보자. 조경이라는 작업은 경청과 공감의 과정을 내재한다는 점에서 시와 연결되는 한편, 조경의 결과물인 공원과 정원이 다양한 존재들이 만나는 장이라는 점도 시적인 구석이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에 따르면 집의 이미지는 “우리들의 내밀한 존재의 지형도”[29]이다. 집은 타인과 만나는 장소라기보다 자아를 존속하고 정박하게 하는 안락의 장소인 것이다. 반면 공원은 모두의 장소이다. 여기서는 각자의 삶에 맞추어진 환경에서 벗어나 다양한 일상들이 마주치고 얽힌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시속 20km로 뛰는 사람과 전동 휠체어를 타고 유유히 산책하는 사람이 마주 지나가고 길에는 속이 후련한 반려견의 뒤처리를 하는 사람이, 의자에는 잠이든 유아차 곁을 지키는 사람이 앉아 있다. 마주침의 장으로서 조경과 그 결과물은 사람들의 지평을 서로 만나게 하는 중요한 사회적 구성물이다.

 
여러 맥락이 관통하는 텍스트를 쓰는 것은 정해진 상을 구축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충분히 감당하고 감안할 만하다. 마스터피스들이 어려움 없이 쓰이고 어려움 없이 읽힐 리 없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좋은 문학이란 대부분의 역사 및 사회과학적 글쓰기가 갖지 않는 혼란”을 가져오고 그것을 읽다 보면 ‘경건함에 대한 불신’과 ‘자기 자신을 맞닥뜨리는 고통’을 만나고 만다[30]. 말하자면 그 불신과 고통은 작품의 지평이 자신의 지평을 깨는 소리다. 볼륨을 줄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으며 읽기와 쓰기를 해나간다면 다음 지평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려움과 혼란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시어는 정확하다. “시는 요약될 수 없다.”[31] 시집을 읽으며 특정 쪽의 귀퉁이를 접기는 하지만 구절에 밑줄을 치는 일은 드물다. 그러지 않아도 찾기 쉽고, 꽉 찬 지면을 어지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정확함을 얻기 위해 시는 “일상의 질서에서 언어를 떼어” 낸다[32]. 일상에서 말을 가져오되, 같은 배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시어가 어떤 울림을 발생시킬 때, 시어는 일상어와 절묘한 거리를 유지한다. 울림의 힘을 갖는 시는 일상의 지평과 시적 지평 사이를 유영하며 독자의 자리이동을 유도한다. 그런데 그 정확함과 절묘함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휘트먼은 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모든 사물이나 성질에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적당한 비율을 부여한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실마리이다,
그는 자기 시대와 대지의 형평을 맞추는 자다.
[33]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율, 다양성의 견지, 시대와 대지의 균형. 나는 이 문장의 주어에서 조경가를 찾았다. 시인-조경가는 멀리 있지도 않고 특이한 사람도 아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자동차 사이드미러의 격언을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일상과 환상의 균형을 꾀하면 그가 맞다.



[1] Cyrus R. K. Patell and Waterman Bryan (Eds.) (2010)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Literature of New York (Cambridge Companions to Literatu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인용한 1855년의 바로 앞인 1853년의 마지막 행은 “뉴욕이 ‘만국산업박람회(the Exhibition of the Industry of All Nations)’라는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이다.
[3] 이하 휘트먼의 공원론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참조. Jill Wacker (1994) Sacred Panoramas: Walt Whitman and New York City Parks. Walt Whitman Quarterly Review 12 (Fall 1994) : 86-103.
[4] Jill Wacker (1994) Sacred Panoramas: Walt Whitman and New York City Parks. Walt Whitman Quarterly Review 12 (Fall 1994) : 96.
[5] Jill Wacker (1994) Sacred Panoramas: Walt Whitman and New York City Parks. Walt Whitman Quarterly Review 12 (Fall 1994) : 100.
[6] 말년에 휘트먼은 옴스테드를 “치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라고 일축해버리기도 하였다. 관련 원문은 다음 웹페이지에서 'Olmsted'를 검색하면 원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https://whitmanarchive.org/criticism/disciples/traubel/WWWiC/3/med.00003.74.html.
[7] Lytle Shaw (2010) Whitemman's urbanism. In Cyrus R. K. Patell and Waterman Bryan eds.,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Literature of New York (Cambridge Companions to Literatu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76-89.
[8] 진은영, 김경희, 「영화 < 패터슨 >에 나타난 시(詩)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88쪽.
[9] 남기준,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01: 통권 1호~50호 – 4.12m 이어달리기」, 『환경과조경』 393, 환경과조경, 2021, 18-19쪽.
[10] Ann Whiston Spirn (2002) The Language of Landscape. In Simon Swaffield ed., Theory in Landscape Architecture: A Reader. Philadelphia, Pennsylvan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p.126.
[11] 구글에서 제공하는 빅데이터 엔진인 Google Books Ngram Viewer를 이용하여 1800년대부터 2019년까지 영문 문헌에 쓰인 연관 단어의 빈도수를 비교해본 결과가 이를 근거한다.
[12]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텍스트」,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2006.
[13] 이상의 두 문장은 다음 문헌에서 참고. 고모리 요이치, 「텍스트」, 송태욱 역, 『매혹의 인문학 사전』, 앨피, 2009, 16-17쪽.
[14] Marwyn Samuels (1979) The biography of Landscape: Cause and Culpability. In D.W. Meinig ed., The Interpretation of Ordinary Landscapes: Geographical Esay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5] 가라타니 고진, 김재희 역,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 한나래, 1998, 43쪽.
[16] Ann Whiston Spirn (2002) The Language of Landscape. In Simon Swaffield ed., Theory in Landscape Architecture: A Reader. Philadelphia, Pennsylvan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p.126.
[17] 이상으로 살핀 서양의 사례는 다음 문헌에서 발췌하였다. 조경진, 「설계가의 시선」, 『환경과조경』 83, 환경과조경, 1995.
[18] Matthew Potteiger and Jamie Purinton (1998) Landscape Narratives: Design Practices for Telling Stories. New York: John Wiley & Sons.
[19] 가다머에게 지평이란 하나의 점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가시권을 말한다. 다케다 스미오, 「지평융합」, 이신철 역, 『현상학사전』, 도서출판 b, 2011.
[20]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역, 『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궁리, 2013, 16쪽.
[21]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역, 『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궁리, 2013, 33쪽.
[22] 강내희, 「공간의 시적 정의와 건축의 외부」, 『문화과학』 66, 문화과학사, 2011, 199-223쪽.
[23]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역, 『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궁리, 2013, 11쪽.
[24] 진은영, 김경희, 「영화 < 패터슨 >에 나타난 시(詩)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68쪽.
[25] “He judges not as the judge judges, but as the sun falling round a helpless thing” 월트 휘트먼의 『풀잎(Leaves of Grass)』 1860년 판 중에서. https://whitmanarchive.org/published/LG/1860/poems/5
[26] 정영선, 성종상, 「정원 대담: 우리 시대 한국인의 삶과 정원」,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한숲, 2021, 99쪽.
[27] 정영선, 성종상, 「정원 대담: 우리 시대 한국인의 삶과 정원」,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한숲, 2021, 107쪽.
[28] John Beardsley(1995) Poet of Landscape Process. Landscape Architecture Magazine 85(12) : 46-51.
[29]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70~71쪽.
[30]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역, 『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궁리, 2013, 33-34쪽.
[31] 김행숙, 「시적인 것」, 『문학의 새로운 이해』, 청동거울, 2004.
[32] 기마타 사토시, 「시와 산문」, 송태욱 역, 『매혹의 인문학 사전』, 앨피, 2009, 342쪽.
[33] “He bestows on every object or quality its fit proportions, neither more nor less, / He is the arbiter of the diverse, he is the key, / He is the equalizer of his age and land,” 월트 휘트먼의 『풀잎(Leaves of Grass)』 1860년 판 중에서. https://whitmanarchive.org/published/LG/1860/poems/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