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조각하기
Sculpting the City


신명진 / mjin.shine@gmail.com





1.
2012년 봄,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뜰에 7,000 여 포기의 꽃이 바쁘게 식재되고 있었다. 하얀색, 노란색, 붉은색과 파란색 꽃이 네 개의 정사각형에 줄 맞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둘레로는 의자 높이의 상록수 생울타리가 둘러졌다. 잘 깎은 잔디밭 사이 광장에는 저마다 색색의 꽃을 든 인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비치는 신고전 양식의 미술관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아래 조경회사 올린(OLIN)의 담당자는 한 장의 거친 스케치 복사본을 검토하고 있었다.

“To plant flowers of four different colors (white, yellow, red and blue) in four equal rectangular areas, in rows of four directions (vertical, horizontal, and diagonal left and right) framed by evergreen hedges of about two feet in height. In the winter the rows of plants would retain their linear direction; in the summer the flowers would bloom and provide color. The type of plant, height, distance apart and planting details would be under the direction of a botanist and the maintenance by a gardener.” (Anon 2012)
[네 가지 색상의 꽃을 네 개의 동일한 사각형 구역에 나누어 심으며, 그 사각형 내부는 네 가지의 방향의 선들로 구성되며, 주변은 2 피트 높이의 상록수 생울타리로 경계 지어진다. 겨울에도 그 열이 유지되어야 하며, 여름이면 꽃이 피어나 생기를 더한다. 식재 종류, 높이, 각 포기 간의 거리와 구체적인 식재 방식은 원예사와 정원사의 관리에 의해 방향 지어진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의 명령문이라고 생각되는가? 바로 미국의 현대작가인 솔 르윗(Sol Lewitt)이 1981년 구상한 공공예술 프로젝트, “꽃으로 만든 네 방향의 선(Lines in Four Directions in Flowers)”의 한 구절이다. 페어몬트 공원 예술협회(Fairmont Park Art Association)의 의뢰로 메사추세츠 주 라일리 메모리얼(Reilly Memorial)을 위한 장소특정적 공공작품으로 구상된 솔 르윗의 유일한 ‘살아있는 조각’ 작업은 작가 특유의 구체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스케일도, 식재 종류도, 심지어 꽃이 피어있는 기간까지도 원예 디자이너로 참여한 로리 올린(Laurie Olin)과 그의 동료들, OLIN에게 맡겨졌다. OLIN은 해당 작업을 대형 스케일로 해석했고, 각 색상별로 연달아 피어날 수 있는 4~5 종류의 꽃을 선정하여 최대한 오랫동안 네 개 사각형의 색상이 돋보일 수 있도록 고안했다. 이를 위해 식재 알고리즘까지 활용했는데, OLIN은 알고리즘이 일련의 명령문과 개념어로 구성된 솔 르윗의 작업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았다.
 
솔 르윗-OLIN의 협업 사례는 공공예술과 조경이 얽히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바로 매체(medium)간의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석의 자율성이다. 솔 르윗은 꽃이라는 매체를 지정했지만, 종이 위 개념과 구상으로만 남겨놓았고, 조경가의 해석과 작업 방식에 있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작업이 구상된 지 약 30여 년이 지나 이 곳에 도착한 조경가는 식재의 종류, 표현되는 방식, 경험의 방법과 과정을 세밀하게 다시 해석해보는 과정을 거쳤다.

Lines in Four Directions in Flowers. Sol LeWitt (American, 1928-2007). Commissioned by the Fairmount Park Art Association in 1981. Realized by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in 2012. Flower plantings, evergreen hedges, gravel paths. Courtesy of the Estate of Sol LeWitt. Photograph courtesy of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개념 미술(Conceptual Art)로 잘 알려진 솔 르윗은 장소를 중심으로 작품의 설치, 경험과 해석을 대중에게 맡기는 구조적 작업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이 타자로서 남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과 이해력을 총 동원해 솔 르윗의 ‘명령문’을 자신의 언어, 개념, 방식으로 작품의 함의를 재구조화하는,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에 모두가 동참하는 형식의 작업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약 2년에 걸쳐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뜰에 설치되었던 “꽃으로 만든 네 방향의 선” 작업은 그 사이에 조경가라는 전문직능이 포함되어 정원이자 공원이자 예술 작품이자 놀이 공간인 어떤 장소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조경에 면하여 있는 공공예술과 참여에 관한 것이다. 도시에서 활동하는 조경가는 말한다. 우리는 도시 경관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오픈 스페이스의 경험을 빚어내고, 도시의 장면을 연출한다고. 동선을 예상하되, 공기와 바람과 햇빛과 빗물이 전달하는 지구의 운명적 움직임을 존중한다고. 나는 이처럼 도시 경관을 만드는 행위, 혹은 설계하고 형태를 빚어내어 실현화하는 일련의 작업은 삼차원적 환경 속에서 작가가 정해 놓은 매체에 변화를 주는 조각 행위와 닮아 있다고 본다. 다만 이 작업은 도시라는 공통 공간(common space)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조각뿐만 아니라 공공예술 담론과도 맞닿아 있다. 이에 더해 경관은 어떤 한 사람의 기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했듯, 좁게는 집 앞의 가로수부터 넓게는 공기와 바람, 미세먼지까지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게 된다. 즉, 일찍이 인류 문명이 태동하던 시절 비롯된 정원이라는 공간의 조형부터 오늘날 커뮤니티 활동을 통한 경관의 재생까지, 우리는 모두 도시를 조각하는 참여자이다. 여기서 혹자는 ‘우리’라는 단어를 조금 더 발전시켜 인류세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본 발제에서는 이 이야기까지 포함할 수 없겠지만, 에코크리티시즘 차원에서 도시 조각하기를 다시금 상상해보는 것도 매우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2.
이처럼 OSOA 2, < 도시 조각하기 >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의 < 조각하기(to sculpt, sculpting) >에 주목한다. 동사로서 < 조각하기 >란 미술에서 재료를 새기거나 깎아서, 혹은 빚어서 입체 형상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조각하는 일과 소조하는 일을 아울러 이른다고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도 밝히고 있다. 우리가 건물을 세우고 올리는 것, 지형의 형태를 잡고 기능을 활성화해 어떤 장소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 심지어 산을 일정 부분 깎아 도로를 건설하는 것도 도시를 대상으로 한 조각 행위라고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주장하건데, 조경가는 도시 조각하기의 훌륭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도시설계가와 건축가, 환경 디자이너도 모두 도시 조각하기라는 공통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단 건물을 세우고, 없애고, 대지에 랜드폼을 올리기 때문이 아니다. 식재를 위치하고, 도시의 중심이 되는 색상을 결정하고, 녹지의 비율을 산출하고, 도로와 수로로 선을 따는 행위는 모두 일정 도시 조각하기의 큰 틀에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어떨까? 특히 공공을 대상으로 하는, 혹은 공공을 위치로 하는 공공예술은 어떨까? 아마 예상하고 있겠지만, 나는 공공 예술만큼 적극적으로 도시 조각하기에 참여하는 분야가 더 있겠냐고 반문하고 싶다. 기능과 미적 가치를 저울질하고 궁극적으로는 미래 도시를 위한 밑그림을 덧칠해야 하는 설계 분야와 달리, 어쩌면 공공예술에서야말로 예리하게 날 선 비판적 시선과 폭 넓은 사고의 틀을 실재로 옮겨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공예술에서 작품의 가치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바로 답변하기란 어려워도, 담담하고 묵묵히, 또 때로는 날카롭고 웅장하게 현세를 살피는 작업은 공공 예술에게 분명 ‘가능한’ 작업이다. 때문에 물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도시 사회를, 혹은 도시의 문명을 빚어내는 일련의 작업에서 예술은 고유의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ublic art is not solely an aesthetic phenomenon, but has an ulterior purpose beyond eliciting an aesthetic reaction valued for its ownsake. Typically, this extra aesthetic element has been thought to be of a social character, ranging from commemoration to celebration. Yet despite its short history as a concept, some scholars have considered public art a much older phenomenon than art itself.” (Puolakka 2016)
[공공예술은 미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로 미적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점 이상의 목적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이 추가적인 미적 요소는 기념비적인 것부터 축하행사까지 사회적인 성격일 것이라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개념적으로 역사가 짧을지언정, 몇몇 학자는 공공 예술이 예술 그 자체보다도 오래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한다.]

본 발제에서 최대한 피하고자 하는 것은 공공예술이 무엇인지, 조경이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정의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다만 미술사학자 푸올라카의 말을 빌려, 공공예술은 개념적으로 봤을 때 ‘예술 그 자체보다도 오래된 것일 수 있다. 서주환과 지소강은 공공미술에 대한 정의에 “예술의 가치 위에 공공성, 소통성, 참여 등의 사회적 가치를 추가함으로서 민주주의를 문화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고 (서주환 and 지소강 2010), 말콤 마일즈는 기존의 예술 공간 밖에서, 특히 공공의 장에서 예술을 실천하고 위치하는 다양한 행위라고 뭉뚱그려 표현하기도 한다 (Miles 1997). 20세기 후반 조각의 개념적 전환에 대한 글에서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조각이 “배제의 복합체(the combination of exclusions)”로 남게 되었다고 비판한 바 있는데, 아마 공공예술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Krauss 1979, p. 37). 공공과 예술, 그리고 공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고대 그리스 신전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시행중인 소위 ‘건축미술법’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기에, 즉 다양하고 끝없이 세분화되고 팽창하기에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앞으로 다양한 사례에서 공공예술과 조경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과 맞닥트리게 되겠지만, 옳고 그름의 정도를 논하기보다는 공공예술과 조경이 조우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함을 기억하는 것이 본 발제의 목표이자 기대효과이다.
 
실제로 공공미술과 경관, 도시라는 키워드로 구글에 검색을 하면 수많은 결과물이 양산되겠지만, 크게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기념비 혹은 메모리얼들, 대도시의 공공미술 프로그램, 도시재생, 정원과 공원, 비엔날레 등이다. 물론 이 마저도 광활한 지평을 그리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만큼 공공예술과 조경은 겹치는 지점이 다양해왔고,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번 발제는 그 다양함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에피소드와 담론을 몇 가지 더 소개하고 마지막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도시 조각하기라는 이번 발제 제목만큼, 지금까지의 작업만큼이나 앞으로, 즉 미래 조각될 도시의 경관을 기대하는 마음이 전달되기 바란다.


3.
조경과 공공예술, 특히 조각의 조우가 가장 두드러지는, 혹은 가장 ‘표준이 되는’ 지점은 바로 정원이라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정원이라는 환경과 그 환경에서 작동하는 예술적 포커스로서의 조각물이다. 특히 퍼포먼스 요소가 내포되어있는 픽처레스크 정원의 모습을 보면 초점을 조각품 혹은 수목 군락이나 고대 로마의 폐허를 닮은 폴리에 놓고 주변 환경을 펼쳐나가며 보는 자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기법이 활용되었다. 이는 경관의 통합적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조경과 조각물이 소통하는 관계에 놓여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원이라고 보기에는 스케일적 차이가 있겠지만, 픽처레스크라는 미적 언어 속에서 정원과 유사한 역할을 도맡았던 센트럴파크에서 좋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뉴욕 중심에 조성된 이 공원의 초창기 설계도면에는 단 하나의 조각품이 존재했다. 센트럴파크 베데스다 분수(Bethesda Fountain) 중앙에 서서 우아하게 흐르는 옷자락을 자랑하는 “물의 요정(Angel of Waters)”이다. 1873년 엠마 스테빈스(Emma Stebbins)의 조각으로, 여성 작가가 만든 뉴욕시의 첫 번째 공공 예술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 샘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며, 건강, 순수함, 평화, 안정감을 상징한다.
 
여기서 주목 하고싶은 단어는 ‘상징’이다. 미술계에서 영향력으로는 여전히 손에 꼽히고 있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논리적으로 봤을 때 조각은 기념적 상징물”이며, “특정 장소에 위치하며 해당 장소의 의미에 대해 상징적으로 표현한다[By virtue of its logic a sculpture is a commemorative representation. It sits in a particular place and speaks in a symbolical tongue about the meaning of that place].(Krauss 1979, p.33)” 우리가 조각을 떠올릴 때 연관된 상징성, 혹은 기념비성과 쉽게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각이라는 매체는 상징성과 너무 오랫동안 연관되어 존재해온 것이다. 조각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을 표현시키는, 혹은 표현된다고 믿고 싶은 사회적 관성은 동물적 본능처럼 우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특정 장소에 위치하고 대중의 시선이 모이는 조각은 상징성을 반영한다. 우리가 이런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기존의 지식 체계와 논리 구조를 대입한다는 것 역시 ‘조각’이라는 매체가 기존의 개념으로부터 완전한 탈피를 이룰 수 없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이는 크라우스가 주장한 모더니즘 조각의 한계 – “기능적으로 비장소적이며 거의 완전하게 자기참조적인”(Ibid.) – 이자 포스트-모던의 재해석 – “확실한 파열을 인정하는 것과 논리적 구조의 관점으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본다는 가능성”(Ibid., p.44) – 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먼저 모더니즘 조각은,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해석을 빌리자면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자기파멸로의 길에 놓여 있었다. 즉 환경으로부터 괴리된 조각은 조각의 지리위치적 본성으로부터 조각의 물성을 분열시켰고, 이에 따라 자체적으로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는 해석까지도 가능하다.
 
보다 재미있는 지점은 포스트모던 조각에 대한 크라우스의 해석이다. 조경과 공공, 그리고 예술의 만남이 포스트모던적 맥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장소특정적 예술, 대지예술, 환경예술은 모두 조각의 경계에 존재하면 발전한 예술이며, 오늘날 공공예술의 많은 지점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 모든 개념이 조각으로부터 발화되었다고 보기에 – 계보적 미술사적 측면에서 – 논리적으로 연결하기가 어려웠다는 현실, 이것이 크라우스가 1979년 당면한 과제였다. 대지를 만나 조각이 분열하고 확장하는 것이 계보적 미술사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자,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논리적 구조에서 가능성을 확장하는 개념의 포스트-포더니즘이라는 것이 골자이다. 나는 이 지점을 또 ‘조각이 진지하게 공간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본다. 장소라는 맥락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물체로서 조각은 장소에 개입함으로서 물성을 전환할 기회를 얻었다. 즉, 조각이 오브제로서의 한계를 벗고 과정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4.
80년대 대한민국의 조각공원 붐을 이끌었던 조각가 김영중은 도시의 미학에 대한 글에서 조각을 비롯한 도시조형물의 역할을 주장했다. 그는 “기능 위주의 도시공간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 양면적 인성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도시의 주인이 오히려 도시에 의해서 소외되는 모순을 인식하고 인간을 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도시내 모든 조형물에 대해서도 그 기능성 계발과 더불어 인간의 조형적(정신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김영중 1978, pp.44-45). 그가 ‘도시조형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조각부터 인프라, 스트리트 퍼니처까지 다양한 사물을 아우르는데, 사실 공공예술로도 치환이 가능한 말이다. 공공의 일상에 가장 맞닿아 있는 예술적 물성이, 그에게는 조각이라는 형태였을 테다.
 
그의 작업 세계였던 조각은 물론 오랫동안 가장 ‘고전적인’ 공공예술의 하나였다. 서기 200년경 로마의 광장에 등장한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공공의 미적 경험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공공 공간’에 존재하는 ‘조각 작품’이 공공예술과 동일시되었던 시기는 인류의 문명사회에서 길고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조각만을 도시의 공공예술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양한 매체를 요리한 설치미술과 사운드예술, 심지어 퍼포먼스도 조각이라는 테두리 안에 오롯이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인다. 이는 조각이 공공예술과 동일시되었던 언젠가 이후, 조각이 장소와 공간을 중심으로 경계의 확장을 이루었던 지점을 지나 공공예술 개념이 그 자체의 확장을 이루며 발전해왔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다.
 
힐데 하인(Hilde Hein)은 공공예술의 시대가 도래한 시점을 미술관과 도시환경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20세기 말 오브제-중심적 집착이 전환된 시점이 정적인 것보다 과정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는 시점과 동일한 시기라고 설명한다(“That peculiar object-centered fixation shifted toward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when a preference for process over statis also emerged”) (Hein 2006, p.xx).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인이 이 두가지를 인과관계로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공공예술의 패러다임이 조각에서 설치로, 경관으로, 장소로 확장한 과정을 하나의 이어진 계보로서 보는 관점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하인의 설명은 공공예술이 아닌 조경에도 바로 적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20세기 말 도시계획에 있어 시민참여와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의 급격한 상승은 도시환경을 이루는 것이 특정 오브제가 아닌 과정과 관계성이라는, 사회적 관념의 변화에 따른 분야의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경에서 커뮤니티 디자인이 도시재생으로 진화했다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시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에 가깝다는 해석이 더 알맞을 것이다. 조경의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조형적 경관은 커뮤니티 디자인에 닿았고, 공공예술에서 조각과 설치는 퍼포먼스로, 참여로 이어졌다. 그리고 공공예술의 차원에서 커뮤니티 디자인과 참여 예술 사이에는 아주 얇은 막의 경계만이 남게 되었다.
 
김영중이 설명한 도시에서의 인간의 조형적 욕구, 혹은 미적 충족감에 대한 욕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사회는 미적 경험을 욕망하고, 어떤 관점에서는 오히려 훨씬 더 구애받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다만 이 도시에서의 미적 충족감, 혹은 공공예술의 기제가 바뀌었다는 점, 또는 ‘도시를 조각하는 방식’이 계속해서 바뀐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공공예술은 도시라는 장소적 성질에 구속되며, 도시는 인간 사회로 인해 상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정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시에서 미적 경험을 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5.
물론 조경과 공공예술의 분야적 확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각 분야의 경계점에서 매체의 한계를 탈피하고 새로운 논리를 짜는 과정은 일정 부분 분야간 겹침으로 나타나며, 특히 경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형 장소특정적 공공예술 작품은 조경의 시선에서 역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2009년, 조경계는 모두가 기대했고 걱정했던, 그리고 전 세계 조경인에게 영향력을 미칠 공원의 첫 개원을 기대서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뉴욕의 하이라인(Highline)이다. 철도를 선형 공원으로 탈바꿈해 완전하게 새로운 층위를 생성하는 이 작업은 도시를 조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달리 말하자면 전 세계 도시에 들이닥친 철도 공원 조성 붐으로 이어졌다. 철도의 선형공원화로서는 결코 첫번째의 사례라고 볼 수 없겠지만, 강철과 콘크리트로 지지된 공원 층 아래 넓게 뚫린 공간은 도시공원 프로그램의 새로운 양상과 함께 수많은 예술인의 작업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2011년 파리 튈르리 정원에 등장한 아드리안 빌라르 로야스(Adrian Villar Rojas)의 작품, “지구인을 위한 시(Poem for the Earthlings)”는 땅 속에서 발굴되어 탐사를 위해 흙먼지를 털어낸 지하 벙커의 생김새를 지녔다. 이 작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지구 멸망 후의 세계로 주변 경관을 재편성하는 힘을 가진 작품이다. 이에 더해 임시 설치되어 전시 후 파괴되는 것 까지가 작품의 일부이다. 즉, 장소특정적 조형물로 등장한 작품은 임박한 경관의 변화를 암시하는 동시에 퍼포먼스를 예견했다.

 
도시 경관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두 작업은 분명 접점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이 변화가 하나의 이벤트가 아닌 다차원적 층위로 이어진다는 점도 역시 계속해서 시선을 잡아 끈다. 물리적 형태의 조각에서 장소와 공간, 과정과 참여를 지나기까지 조경과 공공예술은 많은 만남과 이별을 넘겨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번 발제를 통해 내가 전달하고 싶은 단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도시에서 조경과 공공예술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하며, 반대로 동시에 무척 단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결과론적으로 두 분야를 바라보며 회상적으로 두 가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애쓰고는 한다. 그 과정에서 두 분야는 앞뒤를 바꿔가며 인과관계로 엮이고는 한다. 하지만 조경과 공공예술의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이 두 분야가 각자 발전을 해가는 과정에서 접점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며, 서로의 눈과 입으로 더욱 재미있는 해석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 과정에서 조경은 공공예술로, 공공예술은 조경의 일부로 편입되며, 풍부한 분야간 확장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참고문헌

Anon. 2012. “OLIN-SOL LEWITT GARDEN INSTALLATION AT PHILADELPHIA MUSEUM OF ART | THE UNTITLED MAGAZINE.” Retrieved July 24, 2021 (https://untitled-magazine.com/olin-sol-lewitt-garden-installation-at-philadelphia-museum-of-art/).

Hein, Hilde. 2006. Public Art. Thinking Museums Differently. Lanham: Altamira Press.

Krauss, Rosalind. 1979. “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 October 8(Spring, 1979):30–44.

Miles, Malcolm. 1997. Art, Space and the City: Public Art and Urban Futures. London: Routledge.

Puolakka, Kalle. 2016. “Public Art and Dewey’s Democratic Experience: The Case of John Adams’s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74(4):371–81.

김영중. 1978. “도시와 심미성: 도시와 조각.” 도시문제 13(7):36–45.

서주환 and 지소강. 2010. “환경 조각 작품에 미치는 주변 경관의 시각적 영향력 분석.” 디자인지식저널 16: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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