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조각하기〉에 대한 토론문 #1

‌베를린에서 본 도시 조각하기
‌


김정화 / 도시경관연구회 BoLA 회원, 막스플랑크 예술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
‌


‌

솔 르윗과 로리 올린의 협업 사례를 통해 발제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공공예술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행위로 이해하며, 공공예술과 조경의 공통 분모를 참여에서 찾는다고. 참여의 가치로는 상상력 촉발이나 과정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출발하며 필자는 먼저 공공예술의 장소적 가치를 논의하기 위해 정원과 도시를 구분하고 도시에 방점을 두려 한다. 다음으로 지난 몇 달간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마주한 공공예술 사례를 중심으로 발제자가 제기한 참여라는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와 그 가능성에 대해 풀어보려 한다. 끝으로 본 세미나의 시의성에 대한 질문과 함께 더이상 새로운 소재가 아닌 공공예술을, 지금, 조경이 들여다 보아야 하는 이유를 모색할 것이다.
 
 
극장으로서의 정원 vs. 장소로서의 도시

발제자는 조경과 공공예술의 접점의 하나로 정원, 특히 픽처레스크 정원을 잠깐 언급한다. 정원 속 조각품이 주변 환경과 맞물려 상상력을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원이 발제자가 주장하는 공공예술의 가치, 즉 참여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조경 사학자 존 딕슨 헌트(John D. Hunt)에 따르면, 많은 픽처레스크 정원은 상징과 알레고리가 가득한 극장(theatre)이었는데, 여기서 조각은 퍼포먼스 수행자였고 경관은 이를 뒷받침하는 무대이자 재현 장치였다(Hunt, 2012). 바꿔 말하면, 픽처레스크 정원 속 알레고리로 존재하는 고대 신화 속의 인물상 앞에서 우리는 관람자에 불과했을 뿐이다. 참여의 기회를 열어두고 있는 곳은 우리의 정체성과 생활이 얽혀 있는 곳, 삶의 터전이자 내 공동체의 기억이 집적된 공간, 바로 도시일 것이다. 정원이 아닌 도시야말로 내가 주체적인 참여자로 존재하는 곳, 발제자가 주목하는 공공예술이 공간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장소"이다.
 


공공예술과 도시 거주하기: 원더랜드 베를린에서 보는 공공예술
 
그렇다면 공공예술을 통해 도시에 참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발제자는 참여를 소통과 관계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를 궁극적으로 도시민이 대중예술을 계기로 도시, 경관, 삶을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사회학자 오토 볼노(Otto F. Bollnow)가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공간관으로 강조했던 "거주하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도 볼 수 있는데(볼노, 2011), 실제로 공공예술은 현재 필자의 베를린 거주를 이끌고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베를린은 하나의 거대한 공공예술 작품으로 불리는 도시이다. 특히 장벽이 무너진1990년대 베를린은 당시 이 도시를 기록한 사진집의 제목처럼 "원더랜드(Wonderland)"였다(Fesel & Keller, 2014).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 사람들은 이 도시를 캔버스 삼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창조적 폭동을 벌였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필자가 베를린을 걸으며 포착한(오토 볼노는 거주하기의 한 가지 방식으로 도보여행을 제안했다) 세 가지 공공예술 혹은 공공예술적 조경을 소개한다.
 
첫째, 베를린 원더랜드의 출발이 되었던 이것부터 말해야겠다. 동서 베를린을 가르고 있던 장벽, 바로 "마우어(Mauer)"이다. 마우어는 베를린 이곳 저곳에서 보이는데, 필자의 생활 반경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출퇴근길 트램을 따라 베를린 월 메모리얼(Berlin Wall Memorial)이 보이며, 여유 있는 주말이면 마무어 파크(Mauer Park)가 떠오르고, 만보 걷기를 할 때 인발리드 파크(Invalid Park)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장벽을 수정하거나 전복시키거나 파괴함으로써 과거의 베를린을 무효한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베를린의 새로운 경관과 지평을 여는데 동참하고 있다. 인발리드 파크에서 장벽은 과거 속으로 가라앉는 구조물로 전복되었고, 베를린 월 메모리얼에서 두꺼운 콘크리트 장벽은 동서 양쪽을 보여주는 연속된 철봉 프레임과 수목으로 교체되었으며, 마무어 파크에서 장벽은 매일 새로운 벽화와 낙서가 올라오는 오픈 갤러리가 되었다.
 
둘째, 놋쇠로 만들어진 블록에 나치 당국에 체포된 사람들의 이름과 거주지, 출생 날짜 등을 기록한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의 프로젝트, "걸림돌 블록(Stolpersteine)"이다. 걸림돌은 베를린 어느 한 장소에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구조물이 아니다. 10x10cm 크기로 이들이 살았던 집이나 실종된 장소에 위치해 있어 베를린 시내 곳곳에서 발에 채이는 블록이다. 현재 베를린 일대에 총 8,507개가 있다는데, 필자는 집 근처 지하철 역 앞에서, 수퍼 가는 길에, 커피를 사러 가다가, 연구소에 가는 길목에서 만나곤 한다. 여기 저기에서, 시시때때로, 예기치 않게 접하게 되는 만큼 블록들은 수시로 희생자들을 소환한다. 일상성 외에도 이 프로젝트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 한 가지 더 눈 여겨 볼 부분이 있는데, 바로 악티베스 무제움(Aktives Museum)이라는 시민단체의 역할이다. 이 프로젝트를 움직이는 동력은 하나에 120유로에 이르는 걸림돌 제작 지원부터 주기적인 청소와 유지관리, 추가 제작이 필요한 희생자에 대한 연구, 학생 대상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이르는 일들을 맡고 있는 위 단체의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참여에서 비롯한다.
 
셋째, 이번에는 정원이라는 형태를 택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보자.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독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금아트프로젝트(keumartproject)의 2019년 작 "제3의 자연(Das dritte Land)"이다. 필자의 연구소가 위치한 쿨투르포룸(Kulturforum)에 있어 거의 매일 마주치고 있다. 연구소 첫 출근 길,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 잔디밭 위에 놓인 몇 개의 바위 덩어리를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공사용 재료"라고 생각했다(마침 이 옆은 20세기 박물관 건설 현장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으로부터 이것이 한반도의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 정원이라는 설명을 들었으나, 나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바위 사이로 노출된 흙과 시들시들 올라오는 몇 포기의 풀 앞에서(때는 이른 4월 이었다), "정원의 본질은 돌봄인데, 내버려져 있구만. 정원의 탈을 쓴 예술의 한계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자못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5개월 동안 봄과 여름을 보내며 작품은 정원이라는 옷을 입은 이유를 보여주었다. 백두대간을 뜻한다는 바위 주위로 남북한 식물 45종은 어디가 남한이고 어디가 북한인지 모르게 계산된 경계를 조롱하듯 이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인 식물 경관은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나의 기억 속에 누적되면서 어느덧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통일을 이룬 지구 반대편의 나라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과 멀리 않은 곳에서, 경계의 부질없음을 증명하는 순간들을 만들며 정원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인간이 만든 경계는 자연 속에서 무효하다는 생각과 믿음이 필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몸을 벗어나, 장소를 벗어나
 
베를린에서 본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도시의 과거를 수정하고 전복시키며, 일상적으로 몸을 맞대고 역사를 상기시키도록 하며, 변화하는 경관을 기억하여 메시지를 쌓도록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집합적 기억을 만들고 도시 경관을 경험하거나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공공예술과 도시(민)의 소통에 있어 필수적 조건인 기억이나 체험의 통로로서의 몸, 그리고 맥락으로서 장소는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동시대에도 유효할까?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팬데믹 시대와 디지털 시대 속에서 참여의 기제인 몸과 장소라는 조건은 언뜻 위기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인터넷 공간이라는 비장소에서 보내고, 물리적 공간에서는 신체적 접촉을 멀리하고 거리두기를 실천한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미디어는 신체와 감각 기능을 확장한다고 주장했다(맥루한, 1997).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공공예술이 미디어의 형태를 띨 때 팬데믹 시대와 디지털 시대 새로운 참여의 통로를 찾을 수 있다고?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을 조경 분야로 가져오면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한다며 빠른 속도로 추진되고 있는 소위 "스마트 공원" 사업에 대한 논의도 새로울 것 같다. 공공예술과 조경이 맞닿은 지점에서 발제자가 지목한 참여라는 키워드는 디지털 시대 스마트 공원에서도 유효하리라. 스마트 공원이 단순히 기술을 전시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시설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감각기관을 확장시키는 미디어를 품을 때, 공공예술로 존재할 때 말이다.




References

마셜 맥루한. 1997. 미디어의 이해. 박정규 옮김.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오토 볼노. 2011. 인간과 공간. 이기숙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Fesel, A. & Keller, C. 2014. Berlin Wonderland: Wild Years Revisited, 1990-1996. Berlin: Bobsairport.
Hunt, J. D. 2012. "Garden as Theatre," in A World of Gardens. London: Reaktion Books Ltd, pp. 147-159.

‌
‌
‌


〈도시 조각하기〉에 대한 토론문 #2

바람산 연립하기
‌



김창재 / 작가-기획자‌


‌

* < 바람산 연립 >은 2021년 김창재 작가가 서울시-문체부의 후원을 받아 신촌의 바람산에서 진행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바람산에 위치한 공공시설 일대가 공공의 장소로 작동하고, 이곳에서 지역주민과 관공서, 시설과 청년이 연립하는 것을 주제로 한다. 지자체의 장소에 대한 기획과 분절적인 운영에 개입하기 위한 예술적 상황을 연출한다. 인터뷰, 워크숍과 강연, 공모와 전시, 출판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1.
풍산. 산의 이름은 대개 형태를 따르는데, 신촌에 위치한 바람산은 정해진 모양새가 없는 바람을 이름으로 한다. 그리고 바람산 정상에는 전망대와 풍차가 있다. 서대문구는 풍차를 바람산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풍차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대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속도로 회전하기 위해 전력을 소비한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풍차는 기능을 위해 역동적이고 위협적인 반면, 에너지를 생산할 필요가 없고 안전하게 관리되어야하는 풍차는 무력하게 경험된다. 위협하는 것은 감성적으로 풍요로운 반면 안전한 것은 빈곤하고 위험하다.

 
 
2.
바람산의 북서측 비탈에 위치한 것은 서쪽부터 바람산 어린이공원, 연세대 캠퍼스타운 에스큐브, 신촌문화발전소와 신촌동 자치회관으로 각각 정치, 일, 문화, 생활이라는 시민의 삶의 중요한 요소를 지원한다. 모두 지자체인 서대문구가 소유, 운영하고 있다. 도시정부는 적극적으로 공공의 환경을 바꿔나간다.

 
 
3.
신촌동 자치회관과 신촌문화발전소 사이에 설치된 계단과 주민이 세운 다리-계단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둘 다 필지와 필지를 넘나드는 시설로 편리함과 일종의 초월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전자는 발전소의 건축양식과 같아 해당 건물이 지어질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유추되는 반면, 집과 도로를 연결하는 통로는 일부 끊어져 있어 불법이던 것이 부분 양성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형이나 필지, 도시계획 등을 거쳐 생산된 장소는 고정되지 않고 이용자들의 삶을 통해 전유된다. 이 전유는 다시 공동의 장소 만들기의 조건이 된다.

 
 
4.
대학 인근의 하숙촌인 바람산의 거주자 연령대는 20대가 대부분이지만, 오래 거주하고 지역에서 교류가 있는 사람들은 노인층이다.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5.
바람산 어린이공원은 문화광장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작업의 초기 아이디어는 이 공원이 광장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바람산의 환경은 누적된 필요로 만들어졌다기보다 전략적으로 기획되었다. 대부분의 도시재생사업지가 그러하듯 청년과 문화예술은 이를 위해 동원된다.
광장이 작동하려면 새롭게 유입될 사람들의 마음이 바람산에 엮여야한다.
 
 
6.
바람산은 우연히 방문되는 장소가 아니다.
서대문구는 바람산을 명소로 만들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이동 편의를 높이고자 한다.
 
 
7.
지자체의 기획과 욕망이 과시적으로 전시되는 바람산에서 공공의 장소를 비판적으로 구성하고 기능하게 만들 수 있는가. 이 과제는 개입하고 설득하고 수정해야하는 공동의 과제다.
공모를 기획했다. 공모의 세부과제는 크게 둘로, 1)안전한 보행동선을 마련하는 것과 2)바람산의 공공시설을 유기적으로 활용해 교류와 공동체 활동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별도의 참가자격은 없었지만 주민과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함께 하고자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완했다.
공모는 공공시설의 위아래로 놓인 길까지 대상지로 한다. 주된 보행로로 활용되는 윗길은 교통이 혼재되어 불편하고 위험한 반면, 아랫길은 동선이 연결되어있지 않아 사적으로 점유되곤 한다.
 
 
8.
각각의 쓰레기배출 공간으로 활용되던 신촌문화발전소와 캠퍼스타운 에스큐브 사이 공간은 전시를 매개로 일시적이지만 대안적으로 작동한다. 발전소와 에스큐브는 자치회관과 협의해 쓰레기를 다른 곳에 배출하고 해당 장소를 개방해줬다.
 
 
9.
전시는 투어형식으로 기획되어 현재의 풍경과 공모 당선작 10점을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10인을 섭외해 각 제안에 반응하는 안내 역할의 작업을 요청했고, 이 모음집이 안내서로 배포된다.
 
 
10.
6월 한 달간 설치된 현수막 작업은 전시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풍경을 비판적으로 수정한다. 도시환경을 구축하는 주체를 드러내고 단절되어 기능하지 못하던 장소를 이어 작동하게 한다.
기능을 유지시키는 것은 목표해야하지만, 또 다른 문제다. 다른 상황과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창작자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것을 포함해 각 욕망을 무시할 수 없다. 성실하게 해소할 수도 없다. 이미 수많은 욕망이 과시적으로 우리의 생활 터전에 전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조정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작품은 특정한 경험과 기억을 반복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해 결국 무언가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기능할 줄 몰랐다고 순진한 척 말하지 않도록 하자. 스스로 끔찍한 것이 되거나 이를 보기 싫어 고립을 택하지 않겠다면 개입해 수정하도록 하자. 남는다.
“바람산 연립”은 미래의 사건을 앞당겨 실행한 것뿐이라 쉬운 이야기를 하는 작업이다.

‌
‌
‌
‌